한국일보

[여성의 창] 강영혜 ㅣ 나 그리고 옛 이웃

2011-07-22 (금) 12:00:00
크게 작게
노스캐롤라이나로 이사 간 오래전 이웃이 베이지역에 휴가를 왔다가 우리 집에 들렀다. 씁쓸한 기억 때문에 다신 안 만나리라 다짐했는데 나는 지금 그들과 마주앉아 함께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꽃피우고 있다.

죠니는 중국여자로 로펌 변호사였고, 스티브는 영국인으로 특정 직업은 없는 듯 했으나 핸섬한 외모에 요트 한척을 소유하고 다이빙을 즐기는 낙천주의자였다.

우리가 죠니부부 이웃집으로 이사하던 날, 스티브는 축하편지를 건넸다. 감사의 뜻으로 저녁 초대를 하자 양복에 꽃다발을 들고 올 정도로 그는 영국신사였다.


할로윈 때, 죠니부부는 클럽하우스에서 파티를 열고 우리가족을 초대했다. 스티브는 손님들을 즐겁게 해준다고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보고 있었다. 초대된 사람들은 먹거나 마시지 않으면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나도 와인을 즐기며 흥에 겨워 춤도 췄다. 시간이 꽤 흘러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저 부부가 언제 다 치우나하는 생각에 죠니에게 도와주겠다고 한 후, 부엌에서 내 인생 설거지 경력을 몽땅 발휘하고 있는데 스티브가 찌그러진 그릇을 가리키며 그 속에 있던 음료 의 행방을 물었다. 버렸다고 하니 마구 화를 냈다. 그 술은 구하기도 힘들고 민트도 아주 특별하다며 해프문 베이에서도 특정한 날에만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손님이 왜 남의 부엌에 와서 남의 물건을 버리냐며, 자기가 우리 집에 와서 내 재산을 없애도 되겠냐고 연거푸 쏘아댔다.

죠니는 보이지도 않고 사람들은 구경만 하고 나는 고스란히 혼자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집에 가려는데 죠니가 따라 나오며 자기는 뒷정리를 해야 하니 아기 좀 잠시 우리 집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 즉시 노(NO)하고 싶었으나 그녀의 죄도 아니고 아기가 추울 것 같아 유모차를 밀고 왔다. 이제껏 살면서 남의 집 설거지 도와주다 봉변당해 보기는 처음인지라 억울하고 분함을 주체할 길 없었다. 갑자기 그를 영국 신사라고 생각한 내 자신이 더욱 초라해져 그만 울어버렸다.

다음날 드라이브 웨이를 지나는데 스티브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못 본체하고 가는데 따라와 내 이름을 불러댄다. 아니, 쟤가 미쳤나?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오후에 죠니가 찾아와 남편대신 사과했다. 파티날 밤, 스티브는 술로 인사불성이었고 그 많은 청소와 뒷정리를 혼자하며 그녀도 울었단다.

그들과 함께하니 그날의 생각이 난다. 아직도 찌그러진 양푼 속의 술이 재산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여모 북가주 지부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