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강영혜 ㅣ 할아버지와 나

2011-07-15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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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는 할아버지 한분이 계셨다. 시할아버지께서는 일본유학중 복음을 듣고 진로를 바꾸시어 평생 교육과 목회를 하셨다.

교육열이 높으셨던 그분은 4남매 모두 최고교육을 시키셨고 장자인 남편의 아버지도 유학을 하셨다. 할아버지는 엄격하시어 직접 시간표를 작성하셨고 새벽에 시작되는 피아노레슨부터 학업은 물론 운동까지 돌보셨다고 한다. 은퇴 후에는 엘에이에 오시어 노후를 지내시고 계셨다.

부인과는 일찍 사별하신 후 혼자 지내시다 80이 넘으셔서 재혼도 하였으나 이용된 사기결혼으로 새 할머니가 떠나시는 바람에 홀로 외로이 살고 계셨다. 자연히 해가 감에 따라 연로해지시자 할아버지의 부양문제를 놓고 가족들과의 의견이 분분해지기 시작했다.


성격이 급한 할아버지는 영어도 잘 하셨다. 언젠가는 남편이 비행장에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안 기다리시고 아예 택시를 타고 먼저 오셔서 저녁 준비하던 내 앞에 나타나시어 나를 놀라게 하셨다.

어쩌다 오실 때는 잘해 드렸으나 자주 오실 적에는 아예 여기 오셔서 손자랑 사실 준비를 하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어린애들이랑 분주히 살고 있는데 선뜻 모시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웃어른들이 계시니 우리의 몫이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할아버지는 인텔리셨으나 그래도 내게는 잔소리가 많으신 분으로 여겨졌다. 또한 오실 때마다 잡곡을 손수 가져오시어 오곡밥을 지어야했고 야채주스를 만들어야하니 자연히 일이 많고 몸은 피곤해졌다.

우연히 생활영어책을 뒤적이다가 "생선과 손님은 사흘이 지나면 냄새가 난다"는 밴자민 프랭클린의 말이 한눈에 들어왔다. 깜빡하고 테이블 위에 책을 그대로 편 채로 미장원에 갔다 왔는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돌아오니 할아버지가 집에 가신다고 옷을 단정히 입고 가방도 챙겨놓으셨다.

자초지종을 여쭈니 테이블 위에 책을 보셨는데 그게 내 진심이냐고 물으셨다 .
내친김에 용기를 내어 그렇다 대답했는데 오히려 솔직해서 좋다고 칭찬하시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시카고에 이사 가시면 한동안 못 오실 것 같아 한 달에 두 번씩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얼마나 죄스럽고 민망하던지……. 조금만 참았으면 되었을걸.

그일 이후 나 자신도 손님으로 가면 3일을 채우지 않는다.
이제 할아버지는 고인이 되신지 오래고 생존하셨으면 오늘이 110세이시다.
하늘에 떠있는 반달은 내 마음 알고 있을까? 유난히 달 밝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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