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강영혜 ㅣ 회상2………포도

2011-06-24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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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클 모임에서 남자친구 하나가 자기의 애인 역할을 해 줄 사람이 급히 필요하다고 했었다. 그의 어머니는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신장수술을 하시고 입원중이셨는데, 전에 애인이 있다고 말씀 드렸더니 기뻐하셨고 이 기회에 꼭 만나자고 하셨단다. 그런데 그 무렵 교제하던 여자와 이미 헤어졌던 친구는 사실을 말씀 드리면 상심하신 어머니의 회복이 느려질까봐 몹시 걱정하던 효자였다.

모두들 그를 돕고 싶긴 했으나 사귀는 사람들이 있는지라 마침 그 당시 솔로이던 내가 본의 아니게 그의 가짜 애인이 되고 말았다. 간단히 코치를 받은 후 꽃을 사들고 어머님께 문병을 갔다.

인사를 드리고 준비한 대로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님께서 포도가 몹시 드시고 싶으시다며 좀 사다줄 수 있냐고 물으셨다. 베개 밑에서 만원을 꺼내주셔서 혼자 가까이 있는 시장에 갔다. 그때가 제철이었던지 탐스러운 포도송이들이 터질듯했다. 나는 양손에 포도를 들고 잔돈 얼마와 함께 신촌길을 무심코 걸어갔다.


병실에 도착하여 포도를 씻어 드렸는데 어머님은 왠지 맛있게 드시진 않고, 포도 바구니만 쳐다보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다녀간 후 친구 어머님은 내게 무슨 여자가 저리 손이 크냐며 나와 결혼하면 알뜰하지 못해서 결국 집안이 망하게 될꺼라고 하셨단다. 게다가 너무 놀라 웃으시다가 수술 부위에 문제가 생겨 다시 봉합하는 수술까지 하셨다고 했다. 그분께서는 오직 한 송이의 포도를 원하셨는데 너무 많이 사가서 놀라셨단다.

부모님은 과년한 딸이 남자친구 임시 애인 노릇을 한 것도 못마땅하신데 단박에 퇴짜까지 맞고 오니 집안 망신이라며 집에서 나가라고 하셨다. 그 일 이후 나는 앞으로 고쳐야겠다고 다짐했으나 습관은 버리기가 어려운지 결혼후 집안 어른들께 인사 가면서부터 다시 본색이 드러났다. 집안 몇 분이 시댁에 전화해서 새 애기가 웬 스케일이 그리 크냐고 하셨단다. 순전히 정성으로 마련한 선물을 놓고도 후문이 난무했다.

요즘 갑자기 날씨가 더워져서 과일가게에 갔는데 내게 빨리 집어달라고 아우성치는 듯한 유난히 살찐 까만 포도송이를 외면한 것은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이제까지 포도를 즐겨 먹은 기억이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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