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필마당] 김옥교 ㅣ 웨스트버지니아

2011-06-07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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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버지니아는 내 남편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파거스버그라는 오하이오주와 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인구 삼만 명의 작은 도시에서 그는 이차대전 직후 태어났다.

정작 내가 그곳을 처음 가보게 된 것은 미국에 산지 수십 년 후 시어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서도 한참 후였다. 시어머니가 파킨슨병에 걸리시자 네 명의 자녀들이 요양원이라는 마지막 선택을 했던 것이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시어머니는 휠체어를 타시고 식당에 계셨다.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모든 노인들이 식사를 막 시작하던 중이었다. 삼년 동안 못 본 시어머니는 깜짝 놀랄 만큼 여위어서 나를 경악하게 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약간 뚱뚱하다고 느낄 만큼 배도 나오고 했었는데 그 살이 모두 빠지고 오히려 앙상한 느낌이었다. 식사는 햄버거와 약간의 야채였는데 내가 햄버거 번을 만져보니 빵은 이미 굳어 있었고 온기도 없었다. 나는 왈칵 슬픔을 느꼈다.


이런 것이 늙는다는 것인가! 이제는 늙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시설에서 주는 대로 싫던 좋던 먹어야 한다는 현실이 나를 또 한 번 슬프게 했다. 우리 시어머니는 음식이 까다롭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빵, 따뜻한 커피, 따뜻한 갓 만든 흰밥을 좋아하셨다. 내가 밥을 해드리면 거기다 버터를 조금 넣어 간장을 섞어서 맛있게 드시곤 했다. 시어머니가 캘리포니아에 마지막 오셨던 것이 벌써 몇 년 전이었다. 시어머니는 이미 구십을 바라보고 계셨다. 처음엔 나를 몰라보시더니 한 참후 반색을 하시면서 넌 참 제니를 많이 닮았구나! 하시는 것이었다. 제니는 내 미국 이름이다.

온전히 알아보는 사람은 자신의 아들인 남편과 우리 막내 쟌이었다. 쟌의 손을 꼭 쥐고 행여 놓칠세라 안간힘 하는 모습이 더 애처로워 보였다. 시어머니는 웨스트버지니아가 고향인데 그녀의 남편, 즉 우리 시아버님이 뉴저지에서 대공황때 직업을 찾아 이곳에 내려오면서 서로 만나 결혼을 했다고 한다. 시아버님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한때는 두 여동생과 함께 고아원에서 지낸 적이 있을 만큼 어릴 때부터 고생을 했던 분이다.

우리가 시누이가 살던 샌프란시스코에 안착한 것을 누구보다 기뻐하시던 두 분이다. 처음 우리가 마리나에 방 한 개짜리 아파트를 얻어 살 때 두 분이 함께 오셔서 며칠을 지낸 적이 있는데, 체스넛 스트리트와 롬바드, 유니온 스트리트등 그 동네들의 피자집과 식당들, 정육간이며 심지어는 마리나 해변가에 있던 세이프웨이 까지 모두 너무 좋아하셨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조그만 도시를 가보고야 이해가 되었다. 그분들은 일생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서부의 이 멋진 도시인 샌프란시스코에 오셨으며 자신들의 아들과 딸이 이런 근사한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했던 것이다.

남편은 어릴 때, 일 년에 한번 휴가를 가는 곳이 늘 뉴욕이었는데 기차를 타고 하루 종일 가서 삼촌들을 만나고, 어느 때는 아버지와 함께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서 야구를 관람했던 것이 가장 그때의 하이라이트였다고 한다. 공장의 노동자였던 시아버지가 일 년을 벌어서 모은 돈으로 여섯 식구가 기차를 타고 휴가를 가던 모습이 어쩐지 애잔하게 상상이 된다. 그런 빠듯한 살림에서 아이들을 다 대학 교육을 시켰던 것은 시어머니의 공로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들이 다 자라 화이트칼라가 된 것을 시어머니는 두고두고 자랑스러워 하셨다. 더구나 두 자식이 미국 아니 전 세계에서도 유명한 샌프란시스코에 사시는 것을 그렇게 기뻐하셨다.

우리가 한 오년을 텍사스에 살 때, 추수 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휴가철이면 남편은 여기저기서 많은 선물들을 받곤 했다. 이를테면 맛있는 햄이나 과일, 고급 과자 등이었다. 그때 우리 집을 방문 중이던 시부모님들은 그런 선물을 볼 때마다 또 그렇게 기뻐하시곤 했다. 아마 자신들이 받지 못했던 대우를 아들이 받는다는 대리만족 같은 것이었을 게다.

몇 년 후 우리가 다시 캘리포니아에 돌아와서 크고 화려한 집을 사게 됐을때, 그리고 내가 황금색 볼보차를 가지게 됐을 때도 시어머니는 또 그렇게 행복해 하셨다. 이제 또 내 아이들이 다 커서 그들 나름대로 집도 장만하고 잘 살아가는 것을 보니 그때의 우리 시어머니의 심정이 이해가 되곤 한다.

삼 년 전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우리 부부는 딸아이와 막내 부부와 함께 다시 장례차 웨스트버지니아에 갔다. 장지는 이미 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시아버지 묘지 옆에 마련해 둔 터였다. 누구도 서럽게 우는 사람은 없었다. 장례식후 자식들은 자신들이 어릴 때 살았고 일생동안 어머니가 지키셨던 그 조그만 집을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조그만 거실과 조그만 부엌, 조그만 방들까지 정말 그 협소한 곳에서 한때는 여섯 식구가 살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제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므로 해서 한세대는 가버렸다.

나는 문득 한때 유행했던 죤 덴버가 부른 ‘테이크 미 홈 컨트리 로드’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천국과 같은 웨스트버지니아 불루릿지 산과 쉐난도우 강이 흐르는곳, 그 시골길 그 집으로 나를 데려다주오. 내가 속해있는 그곳이라는 가사를 음미해 보면서 고향이라는 그 따뜻한 이름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았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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