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탈북청년 최효성군의 인생역정 ②
2011-01-20 (목) 12:00:00
“뭘 믿고 아저씨를 따라가나요? 엄마가 보냈다는 증거를 주세요.”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 효성이를 달래기 위해 엄마가 보냈다는 그 사람은 과일 바구니를 가져왔었다. 북한 돈으로 몇 백 원어치는 될 것 같은 비싼 과일이었다. 그렇게 큰 돈을 쓰는 걸 보니 정부기관 사람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도 그 사람은 효성이를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돌아갔다.
일주일 후 그는 또 모습을 나타냈다. 이번엔 어머니가 팩스로 보낸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필체를 보니 어머니 것임이 분명했다. 그 사람은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팩스를 곧 불태웠다. 지금까지는 아버지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었지만 더 이상 숨겨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머니가 보낸 사람을 만났다고 했더니 아버지는 보위부 사람들과 의논을 했다. 그 사람과는 다음 날 오후 3시에 선교각 밑에서 만나기로 돼있었다. 보위부에서는 8명의 사람을 주변에 배치해 상황을 감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눈치를 챘는지 그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며칠이 지나 8월31일. 청소년 축구팀이 일본팀과 양각도 경기장에서 친선 경기를 하는 날이었다. 응원을 가야 했다. 경기장에 들어가려는데 다시 그 사람이 하얀색 밴을 타고 나타나 바로 옆에서 내렸다. “어머니가 가까이에 있다”며 차에 타라는 것이었다. 사람들 눈이 많은 데다 반항하면 어머니 신변도 위험할 것 같아 일단 밴에 탔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 사람을 믿기는 어려웠다. 유인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원산까지 내리 두 시간을 달렸다. 평양을 빠져나가는 건 그가 가지고 있던 통행증 때문에 어려움이 없었다.
“일단 어머니가 살아 계신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효성이는 당시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다시 고원으로 갔다가 국경 근처 훈춘이 바라보이는 모처로 옮겼다. 효성이가 불안해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내키지 않으면 평양으로 돌아가라”고 그 사람은 말했다. 그러더니 셀폰을 꺼내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는 효성이에게 건넸다. “바로 어머니 목소리인 줄 알았습니다.” 30분 정도 통화를 한 것 같은데 계속 울기만 했던 기억밖에는 없다. 그 사람은 “어머니가 큰 일을 한다. 중국으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국경 단속이 심했다. 매일 검문소 근처 200미터까지 갔다가 돌아오고는 했다. 그러다 결행의 순간이 마침내 왔다. 국경 경비대 병사에게는 뇌물을 줬다. 당시 국경 경비대는 현금은 물론 VCR, 녹음기 등을 주면 매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검문소를 통과했지만 중국에 아직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두만강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강물이 불어서 헤엄을 쳐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효성이는 헤엄도 능숙하지 못했다. 얼마 있다가 천막이 쳐 있는 중국 고깃배가 보였다. 배를 타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다시 어머니와 통화를 하더니 “배를 사야 한다”고 했다. 효성이는 그렇게 북한 국경을 넘었다.
중국 쪽 제방을 타고 내려가니 SUV가 한 대 대기하고 있었고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차를 타고 훈춘의 모처로 또 장소를 옮겼다. 이곳에서 다시 효성이는 보름 간 집안에 갇혀 초조하고 지루한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계속>
<이병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