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진정한 용기’

2011-01-03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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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배급사가 광고주였던 시절, 매 영화의 마케팅 전략을 고민하던 습관 때문인지 나는 영화를 고를 때면 포스터의 디자인, 카피문구, 심지어 구석에 박혀있는 협찬이나 프로모션 관련 내용까지 꼼꼼하게 살펴본 뒤 표를 구매한다.

문득 영화 한편 보고 싶어 무작정 극장으로 향한 며칠 전에도 포스터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미지 하나 없이 밋밋한 디자인에 딱 봐도 내가 좋아하지 않는 서부영화임이 분명한 포스터 한장이 눈에 들어왔다.

주연배우들의 이름, 감독 이름, 그리고 영화제목 이렇게 세가지 내용만으로 꽉 채운 포스터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고정 팬이 확실한 유명 형제 감독과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배우 등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관심을 끌고도 남기에 포스터를 이렇게 만들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서부영화를 싫어하는 나의 마음조차 사로잡고 바로 표를 사게 만든 가장 큰 힘은 그 이름들이 아닌 바로 ‘진정한 용기(True Grit)’라는 제목에 있었다.

초등학생 때 나는 스쿨버스를 놓치면 겁 없이 2시간 거리나 되는 집까지 혼자 걸어가기도 했다. 중학생 때는 친구들과 학급문고를 만들고는 인쇄비에 인건비를 더해 가격을 정했다가 반성문을 쓰게 되었는데 고생했던 사람들이 노동의 대가를 받는 것이 왜 잘못인지 알 수 없다고 써 내기도 했다.

서른을 넘어서는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잘 할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 하나로 내 사업을 시작했었고, 더 늙기 전에 해보고 싶은 보석 공부를 하겠다며 무턱대고 뉴욕으로 떠나기도 했었다. 그렇게 예전의 나는 나름 당차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난 2010년의 나를 되돌아보니, 입주한 콘도의 건축업자가 비싼 관리비는 다 받으면서도 콘도 분양이 50%를 넘기 전까지는 체육관 열쇠를 안 주겠다고 우기는데도 꾹 참고 분양이 빨리 되기만을 기다리고,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서도 재정문제와 아이라는 현실을 핑계 삼아 미루는, 용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내가 있었다.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싸우기 보다는 적당히 타협하며 부당함도 참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상황을 바꿔보려는 노력보다는 익숙하고 쉬운 길만 가려고 했던 2010년의 내가 반성되면서 영화에서 말하는 ‘진정한 용기’를 수혈 받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던 것이다.

영화는 아빠를 죽인 범인을 직접 잡아 죄 값을 치르게 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하려는 14세 소녀가 ‘진정한 용기’를 가진 연방 보안관을 고용해서 함께 범인을 쫓는 이야기다. 하지만 정작 내게 ‘진정한 용기’를 수혈해 준 것은 보안관이 아닌 어린 소녀였다.

아빠와 거래하던 장사꾼에게 약간의 협박을 더해 이미 도망가서 없어진 말을 파는 모습, 보안관을 고용하면서 가격을 흥정하고 논리를 따지던 모습, 보안관이 혼자 떠나려하자 말과 함께 깊은 강을 헤엄쳐 건너는 모습, 뱀에 물려 한쪽 팔을 잃었지만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 등은 내가 한동안 잊고 살았던 ‘진정한 용기’를 실천하는 모습 그 자체였다.

윈스턴 처칠은 "돈을 잃는 것은 적게 잃는 것이다. 그러나 명예를 읽는 것은 크게 잃는 것이다. 용기를 읽는 것은 전부를 다 잃는 것이다"라고 했다. “나이 마흔이 가까워오는데 무슨, 애 키우는 아줌마가 무슨, 더블 딥이 온다는데 무슨, 안 짤리고 다니면 감사해야지 무슨”이라며 미루거나 외면하거나 포기했던 일이 있다면, 열두 띠 동물 중 가장 많은 생기를 발동시킨다는 토끼해 2011년에는 토끼의 생기를 받아 용기를 되찾고 실행으로 옮겨보자.


실비아 김
팬콤 전략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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