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 소장의 증언:
1950년 5월5일 평양. 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 소장은 총참모장 강진에게 불려갔다. 강진은 러시아어로 된 두툼한 서류뭉치를 내놓으며 총고문 와실리예프 중장이 쓴 것인데 조선어로 번역해 김일성에게 올리라고 했다. ‘반격작전 명령서’라는 것이었다. 소련 태생인 그로서는 번역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으나 느닷없이 ‘반격작전 명령서’라니…
각 병과별 작전명령, 즉 포병, 공병, 병기, 통신 등 그리고 후방 지원관계에 이르기까지 세밀히 적혀 있어서 상당한 부피였다. “서쪽으로부터 7개 사단의 약 11만1,000명이 비치돼 있으며, 무기 역시 포 1,610문, 탱크 330대, 자주포 128대 등등 국방군에 비해 압도적 우위에 있고 벌써 38선 전면에 깔린 지뢰밭 대부분을 치워버렸는데도 남쪽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이니 전쟁은 시작만 하면 확실하게 승리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작전명령서는 서울 점령으로 끝나 있었다.
1950년 6월24일 밤, 평양 근교 ‘서포굴’엔 조선 인민군 총사령부 작전국장 유성철 소장을 비롯하여 최용진, 김책, 강건, 김봉율, 박길남, 이종민, 총고문 와실리예프 중장 등이 함께 있었다. 공격명령은 암호로 ‘폭풍’, 빨간 신호탄을 쏘기로 되어 있었다. 드디어 빨간 신호탄이 하늘로 치솟고 일동은 ‘폭풍!’하는 함성과 함께 정신없이 박수를 쳤다. 서울을 점령하면 20만 공산주의자들이 떨쳐 일어날 것이며 지리산 중에 숨어 있는 빨치산들이 합세하여 남조선을 완전 해방할 것이니 서울 점령까지 며칠만 넘기면 된다…그들은 벌써 승리감에 취해 있었다.
1950년 6월25일 오전11시. 새벽 4시에 공격명령을 내렸던 김일성은 오전 11시에야 평양방송을 통해 선전포고를 했다. “매국노 이승만 괴뢰당은 38선 전면에서 우리 인민공화국을 공격해 왔다…”
유소장이 처음으로 김일성을 만난 것은 1943년 9월 하바로프스크 동북 약 80킬로 지점에 있는 나나이족 마을인 비얏츠케에서였다. 당시 김정일은 그 곳에서 태어난 ‘유라’라는 러시아 이름을 가진 아기였다고 한다.
유성철씨는 통역관 자격으로 김일성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1945년 9월19일 해방된 조국 원산항에 함께 상륙하게 된다. 6.25전쟁의 작전국장을 맡았던 그의 입으로부터 생생하게 얻은 서울 주둔 3일의 미스터리는 별것이 아니었다. 김일성은 간첩들의 말을 믿고 소련인 총 고문에게 작전계획을 짜게 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1991년 남가주 성우회의 책임을 맡았던 나의 남편(고 김하인)은 숙청당해 구소련에 망명 중이던 유성철을 비롯한 재소 조선인 네 명을 초청, 미국 대학들을 돌며 그들의 증언을 통해 6.25는 확실히 북에서 도발한 전쟁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1년 후, 유장군의 부인으로부터 남편이 가셨다는 편지를 받았다. 자칫 그 귀중한 증언을 못 얻을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남편이 간지도 10년이 되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한국 군 당국에서는 인민군 서울주둔 3일에 대한 이유를 의문스러워 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 내막을 다시 한 번 밝히기 위해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김순련 /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