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전설의 퇴장

2010-06-09 (수) 12:00:00
크게 작게
앨 뉴하트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신문의 하나인 USA투데이를 창업한 사람이다. 그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미국 민주주의와 쿠바 민주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라고 그가 묻자 카스트로는 “헬렌 토마스의 질문에 답할 필요가 없는 것이 차이”라고 대답했다.

헬렌 토마스는 누구인가. 최초의 여성 백악관 출입기자이자 최초의 여성 출입기자협회 회장을 지낸 그녀는 케네디 대통령 때부터 장장 50년 동안 백악관을 안방처럼 드나들며 날카로운 질문으로 대통령과 대변인들을 떨게 만든 인물이다. 70년에 걸친 언론계 생활 동안 그녀는 ‘앉아 있는 부처’라는 별명을 얻으며 백악관의 전설 그 자체였다.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 때 동행한 것을 비롯, 모든 대통령의 해외 순방을 따라다녔다.

그녀에게는 백악관 기자실 맨 앞자리가 따로 배정돼 있었다. 보통 기자라면 기자실에서 쫓겨날 질문을 하는 것도 그녀에게는 허용됐다. 그런 그녀가 89세의 나이로 길고긴 언론 커리어를 접게 됐다. 이스라엘에 관해 입을 잘못 놀렸다 벌어진 일이다.


지난 5월 말 백악관에서 열린 유대 유산 기념행사에 참석한 랍비 데이빗 네세노프는 헬렌 토마스와 만난 자리에서 무심코 이스라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냥 적당히 넘어갔으면 아무 일도 아닌 것을 타고난 매서운 입이 문제였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서 나와야 한다. 그 곳은 이미 주인이 있는 땅이다. 독일이나 폴란드, 미국 등 다른 나라로 가야 한다.”

문제의 발언은 유튜브에 올려져 110만명이 이를 봤다. 토마스는 자기 웹사이트에 사과문을 올렸으나 이미 늦었다. 토마스는 결국 자기 고용주인 허스트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말았다.

1920년 생으로 레바논 출신 이민자를 부모로 한 헬렌의 성은 원래 안토니우스였으나 부모가 엘리스 섬으로 들어오면서 미국식 이름인 토마스로 바꿨다. 중동 출신이지만 헬렌 집안은 회교가 아니라 그리스 정교를 믿었다. 미시간의 웨인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1942년 헬렌이 처음 취직한 곳은 워싱턴 데일리 뉴스였다. 그 후 1년 만에 UPI로 옮겨 장장 60년 가까운 세월을 이곳에서 보냈다. 2000년 통일교가 UPI를 인수하자 “그것만은 좀 심하다”며 허스트사로 이직해 지금까지 일해 왔다.

이번 사건은 아무리 권위 있는 언론인도 이스라엘에 대해 말을 잘못했다가는 자리보전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스라엘을 비하해서도 안 되겠지만 과연 이를 성역시하는 것이 미국을 위해서나 언론 자유를 위해서나 바람직한 일인지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