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4.19 혁명 50주년을 맞이하며

2010-04-19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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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덕 근 / 사람사는 세상-워싱턴 대표

나는 62년 1월에 태어났는데 대학에 들어가서 4.19의 참 모습을 제대로 접하고선 내가 조금 일찍 4.19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아쉬워 한 적이 있다.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은 80년대 초반 전두환 집권시절로 교내 곳곳에 경찰들이 상주하던 살벌한 시절이었고 한 번 교내 시위라도 하려면 목숨이라도 걸어야 했다. 실제로 몇몇의 열사들은 시위 도중에 사망했다.
그래도 해마다 4월이 되면 시위는 격해진다. 4.19의 정신이 학생들을 다시 새롭게 일깨우기 때문이다. 이때는 가두시위도 할 기회가 생기는데 바로 연고전 덕분이다. 매년 4월경에는 연고전 운동 경기가 동대문 운동장과 장충체육관에서 열리며 경기가 끝나면 양교 학생들은 종로로 몰려들었다. 시작은 젊음의 행진이었지만 점차 독재타도의 시위로 변해가고 관악에서 출발한 우리들은 종로에서 그들과 합류하곤 했다. 우리는 항상 깨졌지만 그래도 지치지 않고 계속해 나갔으며 그러한 우리의 원동력은 바로 4.19 승리의 기억이었다.
3.1 운동이 없었다면 4.19는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헌법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되어 있다. 또한 4.19가 없었다면 5.18 광주도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6월 항쟁으로 민주화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이다.
4.19를 미완의 혁명이라 한다. 무엇을 이루지 못했기에 4.19는 미완의 혁명인가?
4.19는 세 가지 목표가 있었다. 첫 번째는 이승만 독재 타도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함으로써 이 1차 목표는 달성되었다. 두 번째로는 민주주의 완성이었다. 하지만 4.19가 일으켜 놓은 민주주의는 바로 다음 해 5월에 총칼을 든 군인들에 의해 처절하게 유린되었다. 민주주의는 박정권 18년도 모자라 신군부 정권 7년을 더 끌다가 87년 6월 항쟁으로 형식적으로나마 복구되었다. 그리고 지난 민주 정부 10년 동안 완전히 꽃을 피웠다.
하지만 마지막 4.19 과제인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로 상징되는 민족의 통일은 아직도 깜깜한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북관계는 20여년 간 깜깜한 상황에 놓여 있다가 10여년의 지난 민주정권을 제외하곤 이명박 정권 들어 다시 암흑으로 빠져 들고 있다. 통일을 이루지 못한 4.19는 그래서 아직 미완의 혁명이다.
더군다나 이명박 정권의 역주행이 가관이다. 촛불 시위하는 유모차 아줌마들을 잡아가지 않나, 미네르바라는 경제 논객을 유언비어 유포로 기소를 하지 않나, 피디수첩 기소를 비롯하여 언론장악 기도 등 4.19이후 애써 이룩한 민주주의를 다시 옛날 이승만 시절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4 19때 고대생으로 시위에 참가했던 대통령이 이 역주행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다. 안암동에서 광화문까지 동지들과 어깨 걸고 시위하면서 그는 정녕 4.19로부터 배운 게 없단 말인가?
다행히 우리 아이들은 민주가 활짝 핀 기상을 받고 태어났다. 그래서 앞으로의 미래는 밝다. 민주주의를 꽃 피웠던 김대중, 노무현 두 분 대통령은 비록 가셨지만 그분들의 혼은 우리 아이들의 가슴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4.19 정신이 우리세대에게 새겨졌듯이 말이다.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4.19혁명의 완성을 이룩해 보자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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