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는 자 기회도 얻게 돼
만남의 의미 깊이 되새겨야
몇 달 전인가 라디오 방송(NPR 방송 프로그램)에서 어느 은퇴한 판사가 어떻게 해서 불량학생이었던 자신이 판사직에 오르게까지 되었는가에 대한 회고담을 털어놓는 것을 들었다.
흑인들의 인권이 말이 아니게 낮았던 1950년대 아칸소주의 작은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올리(Olly Neal)는 공부와는 담을 쌓은 채, 싸움질과 욕설에서만 ‘실력’을 인정받는 골칫덩어리 학생이었다.
12학년 중 어느 날 올리는 수업을 빼먹고, 학교 도서실에 들어가서 한 시간 동안 숨어 있기로 했다. 별 목적도 없이 책장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그는 겉장에 야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책을 보고, 호기심에서 그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가 우연히 집었던 책은 당시에는 별로 이름이 나지 않았지만, 수년 후에 최초의 흑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해진 프랭크 예르비의 소설이었다.
책 스토리에 재미를 느낀 올리는 그 책을 빌리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대여 담당 여학생들이 자기가 책을 빌리는 것을 보고 친구들에게 소문을 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싸움질과 욕설의 실력자라는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궁리 끝에 올리는 책을 대여하는 대신, 몰래 그 책을 품속에 숨겨가지고 나오기로 했다.
한 주일쯤 지나서 다 읽은 책을 슬그머니 책장 위에 가져다 놓는 그의 눈에 놀랍게도 같은 작가의 소설이 한 권 더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 어디 이 책도 한번 읽어 볼까 하면서, 이번에도 책을 옷 속에 감춰서 가지고 나왔다. 두 번째 책을 다 읽고, 다시 제자리에 갖다놓는 올리의 눈에 또 다시 같은 작가의 다른 소설이 꽂혀 있었고, 그는 책을 몰래 가지고 나와서 읽고, 되돌려 주고 하는 식의 루틴이 반복되면서, 그 학기 동안에 올리는 같은 작가의 책을 4권이나 읽게 된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책 읽는 재미에 빠지게 된 올리는 뒤늦게 발견한 독서열의 덕택으로 대학진학의 길이 열렸고, 계속해서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마침내 한때 불량소년의 밑바닥 인생을 벗어나서 아칸소주 항소법원 판사라는 고위직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얘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0여년 후 동창모임에 참석한 올리는 뜻밖에 옛날 책을 숨겨 나왔던 시절 도서실에서 근무했던 밀드렛 그래디 여사를 만나게 되었다.
비로소 올리는 그래디 여사가 자기가 책을 몰래 가지고 나간 것을 알고 있었으며, 처음에는 자기를 붙잡고 책을 공짜로 빌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하다가, 올리가 책을 숨겨 나가려고 하는 사정을 짐작하고는, 일부러 모른 척 했다는 얘기이며, 어떻게 해서든지, 올리의 책 읽는 관심을 지속시키고 싶은 생각에서, 50마일이나 떨어진 멤피스에까지 운전을 해서 계속 같은 작가의 책을 구입해서 책장에 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독서의 즐거움을 심어줌으로써 방황하는 학생들을 한 명이라도 바른 길로 인도해 주고 싶다는 그래디 여사의 열정의 덕으로 올리는 별 볼일 없었던 트러블 메이커에서 법과대학으로 진학한다는 놀라운 변신에 성공했고,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흑인 판사로서 사회에 귀감이 되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만약 그래디 여사가 책을 숨겨가지고 나가는 올리를 붙잡아서 야단을 치고, 훈육주임에게 인계를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올리의 비행리스트에는 ‘책 절도’라는 항목이 더 추가된 채,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본인 스스로도 “올리는 구제의 여지없는 아이”라는 내다버린 불량소년의 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올리는 적절한 때에,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은인인 그래디 여사를 만난 ‘행운’의 덕으로 그의 인생의 방향을 180도 바꾸게 된 것이다.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은 올리의 예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어떤 부모를 만나고, 어떤 배우자를 만나고, 어떤 친구를 만나고, 어떤 주위사람들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평탄하고 행복할 수 있다. 반대로 험난하고 불행할 수도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인생의 행불행과 성공여부는 자신의 의지력에 달려 있는 것이지, 남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이 같은 의견의 차이 중에서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인생을 바르게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인간관계에서 우연의 요소를 줄이고 노력의 대가라는 필연의 요소를 늘리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 어느 날 좋은 사람이 나타나서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우연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이 먼저 좋은 사람이 돼 있으면 좋은 사람을 만나기가 쉬워진다는 필연에 의지하는 것이다.
다시 올리의 예로 돌아가 보자.
한때 장래가 암담했던 불량소년에서 덕망 있는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감동스토리의 교훈은 올리가 책을 숨겨 나왔을 때에 마침 그래디 여사가 옆에 있었다는 행운과, 이 행운을 계기로 해서 올리가 계속 책을 읽었다는 것은 노력의 두 가지 요소가 결합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삶에서 행운과 노력이라는 두 가지 요소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느냐에 대한 생각이 각자 다를 수 있다. “우연은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온다” (Chance favors the prepared mind.)라는 속담이 바로 이 어려운 논쟁에 대한 현명한 답을 해주고 있다고 본다.
김순진 / 교육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