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눈 위의 천사들

2010-03-03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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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차가운 것인데 이상하게 눈이 오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시라도 한 자락 읊고 싶어진다. 바람에 눈이 펄펄 날리는 추운 겨울 밤, 벽난로에 불을 지펴놓고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책을 읽다가 밤이 깊어가는 것도 몰랐다. 창밖을 내다보니 눈이 현관문 앞에 까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지붕이 있는 현관이라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덧문을 열려고 밀어보니 내 힘으로는 안 열리기도 하지만 춥고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포기하고 다음날 아침에 눈을 치우기로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눈 치울 채비를 하고 나가 보니 이미 이웃들이 와서 눈을 깨끗이 치우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렇다고 내가 해가 중천에 뜨도록 늦잠을 잔 것도 아닌데 당황스러웠지만 아무튼 나가서 고맙다고 인사를 나누고 나서 동네를 둘러보니까 이웃이 모여 서로 같이 힘을 모아 남의 집을 치워주고 있었다. 따뜻한 마음이 오고 가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며칠 후 또 눈이 많이 온다고 일기 예보가 주의를 주던 날, 전날 저녁에 팔에 힘을 기르기 위해 아령을 드는 체조를 열심히 하고 다음날 아침 해뜨기 전에 일찍 일어나 눈에 굴러도 괜찮을 정도로 완전 무장을 하고 삽을 들고 나가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한두 삽까지는 할만 했는데 삽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허리를 펴고 큰 숨을 내 쉬고 다시 몇 삽을 떴는데 갑자기 창으로 찌르듯 배가 아파서 삽을 내치고 집으로 들어왔다.
남편이 자다가 깨서 나를 보고 놀라며 누가 눈을 치우라고 하더냐고 화를 냈다. 큰 수술을 하고 죽다가 살아난 지 몇 년이 되었다고 겁도 없이 함부로 몸을 쓰냐는 것이었다. 걱정을 해 주는 것 까지는 고마운데 마누라가 배를 움켜쥐고 아프다고 하면 더운물이라도 한 모금 먹일 것이지 화를 내면서 삽을 들고 나가 눈을 조금 치우고 있을 때였다. 앞집 아저씨가 토마스라고 하는 11살 된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노인이 이런 일을 하면 안 된다”고 하며 남편이 들고 있던 삽을 뺏어 눈을 말끔히 치워주었다. 밖에 나가서 그 아이 어머니를 만나 고맙다고 말하니까 어려서부터 이웃을 돕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니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 같으면 귀한 아들 감기들라 공부하느라 밀린 잠이라도 더 자라고 하지 새벽부터 추운데 데리고 나와 남의 집 앞에 있는 눈을 치우게 안 할 것 같다. 꼬마가 얼마나 일을 잘 하는지 눈 때문에 볼 수 있었던 미국 가정의 자녀 교육이 어떤가 볼 수 있었다.
한 곳에 오랫동안 살다보니 나이 드신 분들이 하나씩 본향으로 가시고 우리가 동네에서 제일 연장자가 됐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어린 시절 오빠들이랑 눈 덩이를 굴려가며 한껏 크게 눈사람을 만들고 나면 마당의 눈이 깨끗이 치워지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2010년 겨울에는 워싱턴에 특별한 축복이 하늘에서 내리는지 또 다시 많은 눈이 내린다고 해서 착잡한 마음으로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쁜 막내 아들 내외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동네 부끄러워 못 살겠다. 토마스에게 용돈을 얼마를 주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자식들이 셋이나 있으며 노인이 눈을 치우게 하느냐 흉을 보겠다. 내일은 제일 가까이 사는 네가 와서 눈을 치워 주면 좋겠다. 회사 일도 중요 하지만 부모를 먼저 도와야지”하고 말했다. 다음 날 아들 내외가 아기를 데리고 도착했을 때는 토마스가 일을 마치고 가버린 후였다.
밸런타인 다음 날이었다. 출근하려고 나갔을 때였다. 옆집 아이가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와서 내게 안기었다. 그 아이 엄마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지난번 눈을 치워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며 천사를 만난 기분 이었다고 했다. “나는 눈을 치우지 않았는데 꽃다발까지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아들 며느리가 어머니에게 주었다고 생각하라”고 대답했다. 서로 다른 민족들이지만 오고가는 정은 눈물겹게 뜨거웠다.

강 혜 정 /폴스처치,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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