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혜란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미주 동부 지부 회장
12월의 셋째 토요일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한 두 송이씩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도시는 윈터-원더-랜드(WINTER-WONDER-LAND)로 변해 있었다.
2피트나 내린 눈은 길게 뻗은 동네 좌우로 눈 기둥을 이룬 것이 마치 제방처럼 버티고 서있고, 눈은 바람에 밀리며 포말의 이슬처럼 뿌옇게 날리고 있었다.
밤거리의 유리창 윈 쉴드(windshield)를 계속 돌리며 달리던 차들은 어느새 모두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숨어버리고, 눈이 높은 탓인지 동네 강아지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눈이 워낙 많이 와서 눈 치우는 차들의 요란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몇 년 전 허리까지 차게 눈이 내려 앞문을 열지 못했던 기억이 났다. 일주일을 출근하지 못하며 집에 갇혀 지낼 때, ‘김치와 쌀은 있느냐’며 걱정해주던 동네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어머니 가슴처럼 포근한 추억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조상님께 큰절하고 감사해야지. 미국 사람들 우유사고 빵 사러나가는데 우리는 냉장고에 김치 그리고 쌀독에 쌀만 있으면 일주일은 오케이(OK)니까. 한국 사람처럼 복 많은 사람들이 따로 있나.
한 두 송이 내리던 눈발이 작은 바람의 회오리에 밀려 함께 달린다. 어째서 미국인들은 모두 마음이 급하고, 눈이 많이 온다는 소식만 들리면 제일 먼저 식품점으로 달려가 사재기를 시작할까. 빵 , 우유, 화장지 등등 이미 집 냉장고에 일주일 이상 먹을 음식이 꽉 차있는데도 3차 대전을 준비하나. 왜 그리 모두들 당황하는지 패닉, 패닉(pan ic)상태다. 그로서리점에 가면 어느새 사람들에 밀려 정문까지 줄이 밀려 있다.
눈이 녹으면 길은 질퍽하고, 모양새가 말이 아니다. 곳곳에 파인 작은 상처들이 무수한 주름살도 만들고, 자동차들은 턱이 떨리는 작은 충격에도 깜짝깜짝 놀란다. 바람이 기세를 더하면 눈발은 짙어지고 행인 한 명 없는 도시는 황량한 침묵이 이어진다. 몇 시간 안에 녹아버릴 것 같지도 않은 눈들 나는 누구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무료하게 창밖을 바라본다.
어쩜 산다는 것은 끝없는 기다림 인지 모르겠다. 그 기다림의 끝이 희망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습관처럼 그렇게 기다리는데 익숙해져 있다.
눈이 워낙 짙게 내려 아무도 밖에 나오는 사람이 없다. 저 멀리 뿌연 눈 속에 솟아있는 늙은 가로수는 엄숙한 설인(雪人)처럼 우뚝 서있다. 그리고 길가에는 고요와 정적만이 가득히 깔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