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데시데리움’은 아주 결렬한 욕망 혹은 중독된 욕망을 의미한다. 독일어 젠주후트(동경, 욕망)와 같은 의미다. 그러나 단순한 동경은 아니다. 육체적 배고픔이 충족되었을 때 인간의 내면에서 무섭게 그리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지독한 동경이다. 지독한 공허함의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안셀름 그륀은 공허함 속에 동경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동경이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는데 있다.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음에 그 심각성이 크다. 특히 성취 후에 찾아오는 내적 공허함이 그렇다. 그래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희망을 품고 여행하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라 했다.
태생적인 데시데리움
(desiderium natural)
냉철하게 우리의 내면을 살펴본다면 마음 깊은 한 곳에서 무엇인가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려는 것이 있다. 그것이 동경이다. 그것을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특히 플라톤은 ‘에로스’라 하였다. 채워도 채울 수 없는 물이 새는 항아리와 같기 때문이다. 윌리엄 워즈워드에게는 그것은 ‘경험의 가장자리(the borderlands of experience)’로 나타난다. 그리고 파스칼에게는 섬세한 정신(l’esprit de finesse)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그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는 “태생적인 데시데리움”이다. 인간의 본성에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동경이 있어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안식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인간의 모든 삶은 방황하는 삶에 불과한 것이라 했다.
파스칼의 메모리얼
파스칼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마음속에 깊은 곳에 새겨진 섬세한 정신 즉 동경으로 고생을 하였다. 세상 것으로 채웠지만 그 결과는 늘 공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654년 11월 23일, 수요일 밤 10시 30분과 12시 30분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 순간을 기록하여 죽을 때까지 몸에 지니고 다녔다. 이것이 그 유명한 파스칼의 메모리얼이다.
“철학자와 식자의 신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동경은 하나님을 찾아가게 하는 이정표다”라는 C. S . 루이스의 말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태생적인 데시데리움에 대하여 직설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더 직설적인 표현은 예수님의 말씀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