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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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 빼어난 곳… ‘이승만·김일성 별장’까지

2009-12-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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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보 국토 종단기<34> - 거진·통일전망대 입구까지

통일전망대가 가까워온다. 거진을 지나니 도로확장 공사가 한창이다. 금강산으로 통하는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넓히는 작업이라고 했다. 커다란 아치가 서있고 “금강산 가는 길목, 희망의 땅, 살기 좋은 고성”이라는 큰 간판이 걸려 있다. 이 도로가 2차선에서 4차선으로, 다시 8차선으로 넓혀지면서 통일의 길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거진 지나니 4차선으로 도로확장 한창
금강산 가는 길 넓어져 ‘통일로’ 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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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 기념관. 마치 실제 살아있는 듯한 이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밀랍 인형이 전시돼 있다.

이정표가 서있다. 통일전망대, 화진포 해수욕장, 김일성 별장 가는 표지다. 어, 김일성 별장이라고? 김일성이 썼던 별장을 복원하여 보존하고 있다고 했다.

바다와 호수가 만나는 석호, 천혜의 경관을 가진 화진포에 이승만 별장, 이기붕 별장도 함께 있다. 미국의 옐로스톤 부근 그렌드티톤 지역에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의 별장이 몰려 있는 것과 비슷하다. 산수가 빼어난 곳에 별장이 많은 것은 당연하겠다.

병목처럼 좁은 길이 나타난다. 자동차 두 대가 겨우 비켜갈 수 있는 비탈길 양쪽에 육중한 시멘트 구조물을 만들어 얹어놓았다. 유사시 일시적으로 길을 막아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만든 시멘트 저지선이다. 휴전선이 가까워온다는 실감이 난다. 4차선 도로가 완성되면 이런 것들은 냉전시대의 유물로 남을 것이다.

죽정 1리 앞. 버스정류소 안에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다. 좀 쉬어갈 겸 길가 ‘느티나무 상점’에 들어갔다.


장사가 어떠냐고 할머니께 물었다. “고사리 따면 하루 한 관은 따는데, 4만원 벌이는 하는데, 오늘 고사리나 따러 갈 걸 그랬다”고 하신다. 여자 일당이 3만5,000원 인데 하루 종일 메어있는 것 보다야 바람도 쐬고 고사리 따는 일이 더 낫다고 덧붙이신다.

오랜만에 라면 생각이 나서 한개 끓여달라고 했다. 라면이 끊는 동안 딸 자랑을 하신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는데 시집갈 생각은 않고 유럽으로 중국으로 쏘다니는 것만 좋아한다고, 좋은 신랑감 있으면 중매 좀 하라고 운을 띄운다. “아가씨 얼굴도 보지 않고 어떻게 중매를 해요” 하니까. “아, 날 닮아서 인물은 괜찮아요” 하신다. 사진 한 장 찍겠냐고 물으니 그렇게 하잔다. 카메라 앞에 서더니 “아니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하면서 얼른 안으로 들어가 겉옷을 바꿔 입고 나와 포즈를 취하신다. 여심이다. 따님 때문이었을까.

금강산 자연박물관을 들러 대진 중고등학교를 지나자 전망대 14킬로 사인이 나온다. 통일전망대 14, 13, 12, 11…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강원도 평창을 지날 때 함께 걸었던 이상엽 선생이다. 내일 친구들과 함께 와서 국토종단 마침을 축하해 주겠다고 한다. 환영 플레카드도 만들어 오겠단다. 먼 길을 일부러 와 준다니 고맙다.

빗방울이 오락가락한다. 발길을 재촉하여 오후 늦게 대진항 부근에 이르렀다. 젊은 외국인 남녀가 내려오고 있다. 에론과 타라라고 했다. 캐나다에서 왔는데 대학 졸업 후 경남 양산에 와서 영어를 가르치는 중이라고 한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몇 개월 전에 자기 학교에서 영어선생을 뽑는데 한국인 2세가 응시했단다.

실력이 좋은 젊은이였는데 외모가 서양 사람이 아니라며 탈락시키더란다. 그러면서 ‘stupid’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영어 선생을 얼굴 색깔을 보고 뽑다니 그들이 보기에도 이상했던 모양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토플시험 준비에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저들은 세계를 여행하며 인생을 즐기고 있다.

영어가 소통의 수단에 그치지 않고 최고의 상품으로 등장한 지금, 영어권 젊은이들이 엄청난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 한국어가 세계어가 되어 젊은이들이 대학 졸업 후 취업 걱정할 필요 없이 외국에 나가 한국어 원어민 교사를 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가져다가 자기 말을 표기하고, 최근 동티모르에서도 한글을 수입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어가 국력이다. 우리말과 글자가 더 많이 세계에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날이 저물 무렵 민통선 입구에 도착했다. 헌병이 착검을 하고 보초를 서고 있다. 내일 이곳에 와서 출입국사무소에 들러 통일전망대 들어가는 신고를 해야 한다. 거의 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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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설치된 아치. 휴전선이 코앞인 탓에 평화로운 분위기와는 달리 주변에는 군사시설이 즐비하다.


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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