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 십자가와 내 팔자가

2009-11-29 (일)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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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범수 목사 워싱턴 동산교회, MD

신문을 읽다보면 오늘의 운세라는 글자에 시선이 머물러 서게 된다. 그 뿐 아니라 중국식당의 마스코트인 행운의 과자(fortune cake)를 보면 왠지 과자 안에 담겨 있는 글을 읽고 싶어 한다. 도대체 나에게 정해진 운명은 어떤 것일까? 나의 사주팔자(四柱八字) 곧 태어난 시, 날, 달, 해 곧 사주(四柱)와 각 사주에 따르는 두 자리 수의 팔자(八字)를 해석한 나의 운명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는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무시해 버리지만 어떤 사람은 신주단지 모시듯이 절대적으로 믿기도 한다.
어느 저녁 검은 색 가면을 쓴 남자가 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의 집문을 두드렸다. 그는 그 저녁에 죽은 사람을 위한 진혼미사곡을 써 달라고 모차르트를 찾아왔던 것이다. 이 남자는 살리에리였다. 사실인지는 모르나 바로 이 진혼미사곡 때문에 모차르트는 죽음의 자리까지 가게 되었고, 곡을 의뢰한 살리에리 자신도 이 곡을 의뢰하였기에 모차르트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에게 심한 열등감과 패배의식에 사로 잡혀 있었다. 자신이 모차르트를 뛰어 넘을 수 없는 어떤 한계를 느꼈던 모양이다. 자기의 인생에게 정해진 사주팔자에 극히 매달려 괴로워했을 것이다.
가끔씩 잊을 만 하다보면 들려오는 어느 누군가의 자살 소식을 접할 때 마다 얼마나 자신을 이기지 못했으면 그런 결정을 했을 까 하는 마음을 갖는다. 성경에는 정말 힘겹게 인생을 산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어느 한 사람은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었다. 유대인의 생각은 만일 어느 누구가 몸이 불편하게 태어나거나 또 병이 들면 하나님에게 벌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 대하여 물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리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이 제자의 질문의 의도는 결국 그 사람은 인생에 어떤 희망이나 가능성을 전제한 것이 아니고 기구한 인생이라고 단정했던 것이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한복음9:3)”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빠져 나올 수 없는 어떤 팔자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과 계획 속에 이루어진 축복된 인생이라고 말씀하셨다. 팔자타령에 울지 말고 새로운 인생의 꿈을 가지라는 말씀이다.
재미있는 책 “어느 거지 소년의 운명을 바꾼 388가지의 낙서”라는 책에서 이런 글들이 있다. “삶에 있어서 성공이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때 혼자뿐이냐, 함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누가 불러 주길 기다리지 마라. 위인은 널 불러 주지 않는다. 네 발로 직접 뛰어가는 노력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만날 수 없다... 사소한 일에 심각한 표정을 짓지 마라. 자주 굳은 얼굴을 하다 보면 정작 진정으로 심각할 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삶은 순간순간마다 결정과 결단의 과정의 연속이다. 그 어느 결정의 순간에서 자신의 삶을 발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느냐 퇴보하느냐 하는 것은 그 마음의 생각이다. 미래를 향해서 창문을 열어 놓느냐 아니면 창문을 닫을 뿐 아니라 커튼까지 내리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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