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떠버리’ 할머니

2009-11-29 (일)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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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옥식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으니, 그 중에 선한 자를 가려서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 자신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라는 말은 필자도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한테 자주 들었던 말이다. 새삼 ‘삼인행’이란 말이 철퇴로 한 대 후려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든다.
우리 할머니는 참으로 부지런하고 기품이 당당하셨다. 경우가 바르고 행동이 크게 어긋남이 없으셨던 분이라, 할머니의 말씀은 바로 우리 집안의 법이었다.
할머니는 종종 일손을 멈추고, 굽은 허리를 두어 번 펴시고는 사랑채 뜰에 앉으셔서 휴식을 취하곤 하셨다. 긴 담뱃대에 불을 붙이고 길게 몇 모금 빠신 다음, 할머니는 꼭 누구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집 안채를 향하여 당신 생각을 말씀하시곤 하셨다.
할머니가 입을 여실 때마다 우리 식구들은 저마다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도 귀는 할머니에게 모여 있었다. 드문드문 할머니의 말씀에 농기구를 정리하시던 아버지가 “어무이 말씀이 다 옳지요”라고 맞장구를 치기도 하였다. 사랑채 옆, 마구간에 매여 있던 암소도 송아지에게 젖을 물리며 알아들었다는 듯이 선하게 생긴 큰 두 눈을 끔벅끔벅하면서 이따금 꼬리를 설렁설렁 흔들어 답하였다.
할머니는 매번 같은 말을 되풀이하시면서도 언제나 처음 하시는 말씀처럼 말에 힘이 들어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도 ‘말’이고, 가장 무서운 것도 ‘말’이니 항상 입 조심하거라”라고 말씀하시고는 곧잘 해석을 덧붙이셨다.
전자는 입을 함부로 놀리거나 잘못하여 그 말에 대한 확인 여부나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보다 더 흉하고 곤혹스러운 것이 없다는 뜻으로 항상 입 조심하라는 뜻이다. 후자는 간교한 세 치의 혀가 때때로 사람의 생사를 가른다고 하셨다. ‘말 한마디’가 멀쩡한 사람의 인격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무서운 독이 될 수도 있고, 죽어 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보약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을 가려서 하라는 뜻이다.
권선징악이 뚜렷한 설화나 간신들의 계략에 유배당한 선비들의 이야기를 자주 예로 들려주셨다. 온 동네를 헤집고 돌아다니며 별의별 소문을 다 퍼뜨리는 우리 마을의 ‘떠버리 할머니’가 다녀가시는 날에는 ‘삼인행’ 중의 닮지 말아야 하는 모델로 영락없이 할머니의 훈계는 시작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시대가 변해도 맞는 말씀인 것 같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 책임지지 못할 말은 아예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반세기를 살아보고서야 확실히 깨닫는다.
오늘날, 정보 통신의 발달로 많은 사람의 귀는 ‘당나귀’ 같고, 입은 ‘하마’ 같다. 사람이 셋 이상 모인 자리에 가보면 아는 것이 많아서인지 듣는 사람보다 목소리 큰 사람이 더 많아 보인다. 그러나 자기 말만 하느라 급급한 자는 타인의 마음과 장점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는 시각장애인과 같을 것이다. 남의 말을 진중하게 잘 듣는 자가 옳고 그름을 잘 판단 할 수 있을 것이며 사람 됨됨이도 잘 가릴 수 있어 크게 마음 다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남의 흉이나 허물을 밥 먹듯이 들춰내는 사람은 ‘물귀신 습성’이 있어 위급한 상황이 되면 그것을 모면하고자 아전인수격으로 제 삼자를 끌어들이는 경향이 있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 깬다”라는 말이 연상될 정도로 신문지상이나 미디어 매체를 통하여 섬뜩한 뉴스를 접할 때마다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자고로 사람대접을 받으려면”하고 시작되는 우리 할머니의 ‘삼인행’론은 본받아야 할 인물들이 줄줄이 등장하였는데, 사람은 어린아이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으니 배우는 것을 멈추어서는 아니 된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이 평생교육이다.
이민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층에 있는 자들은 자신의 목소리는 한 옥타브 낮추고, 진정 우리 이민사회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살펴 우리의 후세대까지 뿌리의 자긍심을 느끼고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자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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