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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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산길 오르니 “아, 하늘아래 첫 동네”

2009-10-2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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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보 국토 종단기 <28> 부연동 가는길

아침 일찍 주문진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어제 떠났던 삼산4리로 되돌아오는 길이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할 즈음 ‘소금강산’ 표지판이 보인다. 어, 여기가 소금강산이라니! 대학을 다닐 때였다. 등록금을 낼 수 없었던 나는 한 해 휴학계를 냈다. 일 년 동안 졸업까지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배낭을 메고 혼자서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강릉에서 마지막 떠나는 시외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고 보니 소금강산 골짜기였다.

묻지 않으면 쉽게 찾을 수 없는 곳
겹겹이 산, 산… ‘산골체험 마을’ 눈길


자고 일어났더니 온 세상이 눈에 갇혀 꼼짝 할 수가 없었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소금강 골짜기를 혼자서 한없이 걸어 올라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힘에 겨워 눈 위에 벌렁 누워 버렸다. 찬바람이 골짜기를 휘돌아갔다. 한참 후, 가만히 귀 기울이니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누워있는 두꺼운 얼음장 밑으로 봄이 오는 소리였다. 무거운 눈을 견디다 못해 등뼈가 휘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벌떡 일어났다. 봄이다, 가자-아! 큰 소리로 외쳤다. 메아리가 골짜기를 울려 여기저기 눈발이 흩날렸다.

그 길로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 년 동안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돈을 벌어 학교를 마쳤다.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데, 소금강이 여기 있는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버스가 삼산 4리에 도착했다. 오늘은 부연동을 거쳐 양양 쪽으로 갈 계획이다. 부연동은 행정구역상 강릉시 연곡동 삼산3리에 해당한다. 부연동 가는 좁은 길로 들어선다. 묻지 않으면 쉽게 찾을 수 없어, 사람을 피해 길이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부연동, 7.5키로”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시작부터 가파른 산길이다. 황토 길인데 물에 씻겨갈 우려가 있는 부분만 포장이 돼있다. 아스팔트가 아닌 흙을 밟고 걸어가니 발바닥에 오는 느낌이 다르다. 낮에도 짐승이 나타날 것만 같은 나무숲이 우거진 산길이다. 숨이 턱턱 막힌다. 그 동안 걸어왔던 길 중에 가장 험하고 힘든 길이다.

여름날, 보릿단을 지게에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오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무거운 짐에 눌려 가슴이 답답해오고, 지게 끈이 어깨를 파고들던 기억들. 먹고 살기 위해 지긋지긋하게 지게질을 했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삶은 때로 비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 또한 삶이다. 역사에 반전이 있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그러기에 자살 소식이 들리면 안타깝다, 오죽 고통스러웠으면 그런 결정을 했을까도 싶지만,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니까. 살아서 별별 추한 꼴을 다 봐야 한다. 그것이 삶이니까. 힘겹게 살아가는 많은 분들, 비루해 보이는 당신의 인생에도 햇빛이 비칠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겹겹이 산이다. 어제 넘어왔던, 진고개에서 내려오는 길이, 멀리 숲 사이로 가르마처럼 보인다. 2시간 정도 걸려서 전후재 꼭대기에 이르렀다. “하늘아래 첫 마을, 부연동”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예쁜 안내판이 서있다. 부연동(釜淵洞)은 가매 부釜, 연못 연淵, 부연천 가운데 가마처럼 생긴 가마소가 있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제부터 내려가는 길이다. 빙빙 돌아 내려가는 길이 거의 절벽 수준이다. 무릎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천천히 조심조심 내려간다.

부연동 입구에 ‘산촌체험마을 안내도’가 그려져 있다. 개울을 건너는데 골짜기로 올라가는 길이 포근하다. 이곳 물푸레 골에서 발원한 부연천이 어성전천으로 흘러간다고 했다. 이 골짜기에 물푸레나무가 많은가 보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이 쬐그만 여자 /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로 시작하는 오규원 시인의 시 ‘한 잎의 여자’가 생각난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산천어가 사는 동네, 범죄가 없는 마을, 집 앞에 핀 밥풀테기꽃이 유난히 희고 고운 마을. 눈물 같은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가 살 것 같은 동네. 햇볕 따스한 고즈넉한 오후에, 때 묻지 않는 이 산골마을을 꿈결인양 지나간다.

혼자 마실 나가는 할머니를 만났다. 적막한 산길에서 서로 반갑다. 버스가 들어오는 어성전까지는 30리를 더 가야 한단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막혀 있어 산 속에 숨어 있는 요새 같은 이 마을을 나가는 길이 만만치가 않다.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호젓한 길을 걸어 어성전에 이르렀다. 해가 꽤 남았는데 들판에도 길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잠시 어리둥절했다. 버스를 타고 양양읍에 들어간다. 내일 아침 이곳으로 되돌아올 예정이다. 아무래도 오늘저녁에는 물푸레 같은 여인을 꿈에서 만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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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동은 적당한 산과 물, 숲이 어우러진 소박한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만든다. 포근하고 아름다운 물푸레골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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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첫 동네. 부연동”전후재 꼭대기에 서 있는 자작나무로 만든 예쁜 안내판.

<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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