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묵향을 따라서 / 서진숙(임마누엘 한국학교 교사)

2009-10-02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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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단일기

아이들의 잡담과 함께 묵향이 방 안 가득히 스며들어 내 코 끝을 스쳐 지나갈 즈음에 아이들이 하나, 둘씩 질문을 해온다. 빨리 끝내기 위해 재촉하는 아이들의 질문들이 이제는 신경쓰이지 않을때도 됐는데 여느때와 다름없이 나는 마음이 조급해 진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새롭게 서예반에 들어온 아이와 잘쓰는 아이들이 있어 더 바빠진다. 이 분위기가 한국학교 특별활동 서예반의 정경이다.

내가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올때 난 한참 서예에 재미를 붙여서 미국에 오기 싫을 정도였다. ‘더 배우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제일 먼저 문방사구를 짐으로 포장 하면서 이것들을 계속 할 수 있을지 생각했었다. 열심히하여 먼 훗날 나의 손자, 손녀에게 필요한 글귀를 우아하게 써 주고 싶은 것이 나의 작은 소망이었는데 과연 한국어조차 하기 힘든 우리 아이들이 관심이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던 중, 한국학교에서 서예를 가르쳐 달라고 하여 반갑게 시작하게 된뒤 한글을 가르치고 서예를 가르치는 것이 마냥 행복한 나의 일과가 되었다.

나 역시 중학교때 특별활동 시간을 선택할때 사군자반을 택하게 되어 배우기 시작한 것이 지금은 나의 일부가 된 것이다. 우리 아이들도 처음에는 옛날 우리 조상들이 쓰신 이 궁체가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얼마나 지루한 일인 지를 알고 시작하진 않았을 것이다.


1학년때 서예를 처음 시작하여 5학년이 된 아이는 지난 주에 조그만 작품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처음 1학년때는 여자 아이지만 괄괄한 성격이어서 거의 먹물을 묻히고 장난이 심하던 아이였다. 그래서 먹물을 뿌리고 장난하던 그 아이가 이제 그 조그만 팔에 붓을 잡고 조심스레 한글을 써 내려갈 때 만큼은 옛 조선 여인의 단아함을 닮아가는 듯 하여서 흐뭇하다. 아빠가 한국인이고 엄마가 중국사람인 아이가 한국이름이 없어서 내가 민지라고 부르는데, 이 아이가 서예를 너무 재미있어 하고 잘 하여서 붓을 사서 집에서 연습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작품을 할 수 있을정도로 발전하였다. 나는 민지가 한글을 서예로 쓰는 것은 더욱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서예를 하는 엄마를 보고 컴퓨터에서 궁체를 눌러서 뽑으면 되는데 너무 어리석다고 말했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요즈음 같이 즉흥적이고 신속한 인스턴트 세상안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아이들이 느리고 힘들지만 인내를 통하여 결실의 기쁨을 맛볼수 있는 서예를 통해 뭔가 얻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힘들지만 여러번의 반복을 통해서 만족한 결과를 얻고 은은한 묵향을 맡으며 진한 차한잔을 마시는 여유는 수고한 사람만의 특권일 것이다.

방안 가득 종이,벼루,문진,먹이 어우러져서 어수선한 가운데 솔향기가 나는 묵향과 차한잔의 여유를 통한 숨고르기를 하며 그 안에서 진한 매력을 느끼기에는 우리 아이들이 아직 어리지만 내가 그러했듯이 지나가는 마음 한 구석에 나와 함께한 공간과 시간의 좋았던 느낌이 잔존하여 커서 어느 때에 우리의 문화를 접할 기회가 생길때 숨겨 놓았던 수첩에서 조그만 단서를 찾아내듯 반갑게 옛 조상들의 숨결이 친근하게 느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이 한국어의 우수성을 알고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기를 기대하며 또한 나와 같이 서예를 사랑하는 제자가 생기기를 기대하며 오늘도 서예반의 소란함중에 집중하는 아이들에게 희망의 비행기를 띄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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