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열 번 찍은 나무 / 송미경(주부)

2009-09-04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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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의 창

우리 가족이 지금 사는 집에서 태어나 마침내 집 근처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아이가 몇 년 동안 요구했지만 들어주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별 게 아니라 옆 집 아이와 함께 노는 것이었다. 그래도 비교적 이민자에 대해 관대한 분위기인 동네에서 강산이 한 번 바뀔 만큼 살았지만 딸아이가 졸라댈 때마다 내 대답은 궁하기만 했다. 시드니, 지금 잔대.

2,3년 전인가 울타리를 맞대고 자라는 또래 아이들끼리 play date를 시도했을 때 금발의 젊은 부부는 우리 아이가 영어를 못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두 아들 다음으로 뚝 떨어져 태어난 딸이라 주변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아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절을 경험한 것이다. 이민 생활에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황하기도 하고 그 애 아니면 놀 사람이 없나 싶기도 해서 나 역시 담장 너머 이웃과는 서로 마음을 주지 못했다.

아이가 자라면서 그 잘하던 한국말보다 영어를 더 많이 쓰게 되자 딸아이는 직접 소원 성취에 나섰다. 그리스 이민자 2세인 옆집 부부와 부모의 그림자 같이 조용한 옆집 아이를 볼 때마다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시드니랑 같이 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미소와 함께 고장난 라디오처럼 언제든지 놀러 오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 언제 어디서까지 진척되지 않았다.


이럴 때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살다 보니 우리가 방문자에서 이민자가 되어 있었고 이민자가 당하는 차별과 설움이야 오래된 이야기이며 특별히 우리는 피부색이 달라서 몇 대를 살아도 이 땅에 이방인일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다섯 살도 채 안된 아이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아니 오히려 아이는 내가 어디까지 미국인이고 어느 정도 한국인인가 하는 고민을 1세인 나보다 더 치열하게 지고 가야 할 운명인 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난 주일 이민자의 자의식을 물려받지 않은 딸아이는 그 가족들을 길에서 붙잡아 놓고 구체적인 약속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그리고는 다음 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면서 뒤따라가는 내게 으스대었다. 오늘 시드니랑 놀거야. 나는 그 말에 반신반의했지만 그 날 아이는 순전히 자기 힘으로 열 번 찍은 나무와 함께 신나게 놀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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