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오른쪽 벽에 걸려있는 색바랜 가족사진! 1살 짜리 내 막내가 제 에미품에 안겨 찍은거니까, 39년 전에 찍은 사진이다. 색바랜 사진이라고 표현했지만 , 옛날 시골집 큰방문 위에 걸려있는 누렇게 색바랜 그런 사진이 아니라 , 꽤 오랜 세월이 흐른 사진이란 뜻이다.
그 때 우리가 살던 수유리 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미아리의 어떤 사진관에서 찍은 거로 기억 되는 이 사진은 그 당시만 해도 칼라 현상기술이 지금처럼 정교하지 못 했던 시절치고는 재법 자연 스럽게 착색된 사진인 것이다. 우리 가족은 이 사진을 찍은지 6년이 지난 1976년, 가을하늘에 기러기 가족이 때지어 쓸쓸히 날라가듯 미국으로 이민 왔다. 그 때 이민 보따리 속에 싸여 왔던 사진인 것이다.
긴 이민생활 동안 우리 집 벽에 걸려, 우리와 함께 이질문명의 강을 건너온 이 사진은 우리가 과거를 반취(새김질) 해 보는 그림일 지도 모른다. 사진 속에 담겨있는 네 놈(딸 하나, 아들 셋) 의 어릴적 모습, 그것도 활짝 웃음을 머금은 밝은 표정과 30대 중반이었던 마누라의 지금의 모습이 아닌 하얀 난식(Soft) 테니스 공처럼 탄력있고, 예쁜 얼굴! 그리고 눈까풀이 지금처럼 축 처지지 않았던 갖 40고개를 넘어 섰던 그 때의 내 얼굴등에서 우리 가족의 행복했던 지난 세월의 한면을 엿보게 한다.
그런데 이 수년 동안 하루에도 열 번 아니 몇 십 차례, 옛날 내가 초등학교 2, 3년 쯤 때, 학교앞 이발관 의자에 앉아 낡은 바리칸이 내 생머리 카락을 뽑아 먹는 아픔을 참아 가며 찡그린 눈으로 이발관 거울 위에 걸려 있는 밀레의 그림 ‘만종’의 사진 복사판을 바라 보던 그 때처럼, 실눈을 뜨고 가족사진을 추껴 올려 보는 습관이 생긴 것은 다름 아닌 수차례에 걸친 내 양 쪽 눈의 수술 이후, 마치 한란계로 그 날의 온도를 알아 보듯, 사진 속 가족들의 얼굴 윤곽의 흐림과 뚜렷함을 통하여 내 시력의 회복 진도를 알아 보기 위해서인 것이다.
사진 속의 네 놈이 이제 50대로 또 40대로 접어든 모습을 보면서, 내가 하던 일을 그만 두고는 절대로 이민길에는 오르지 않겠다던 그 때의 내 고집이 다시 내 추억의 토막이 되어 되살아 난다. 하지만 나의 고집은 그 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고위층이나 부유층 자녀 아니면 미국유학을 좀처럼 꿈꾸지 못했던 시절이었기에, 가족이민으로 자연 스럽게 네 놈을 데리고 유학길에 오른다는 심정에서 나의 망서림과 고집은 꺾이고 말았던 것이다.
33년 이민생활의 평가를 좋은 쪽으로 자위해 본다면, 가지 많은 나무에 어찌 바람 잘 날이 없었겠느냐 마는 그래도 나무둥걸이란 나와 제 에미의 몸체에서 뻗어 난 그 놈들이 모진 바람에도 단 한 놈도 부러지지 않고 잘 버티고 뻗어나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고마운게 있다면 단 한 놈도 먼곳에 가 살지 않고 우리 집에서 5분 내지 20분 거리에서 살면서 한 달에도 몇 차례씩 혈육의 온기를 나누며 살고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나날이 나이를 더해 가는 우리 가슴에 아쉬움이 짙게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게 있다면, 우리 1세대는 떠나온 조국을 하루에도 수 없이 그리워 하며 살고 있지만, 우리의 2세나 3세는 그들의 가슴에서 한국인이란 정체성이 희미해져 가고, 끝내는 상실 되고 말것이란 엄연한 사실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서글픔 속에서 오늘도 바라 보는 이 색바랜 가족사진은 밀레의 명화 ‘만종’ 보다도 우리 가족에게는 더 값진 우리의 과거이자 추억이며 그리고 마누라와 내가 51년 함께 살아 온 흔적의 자국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