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 수잔 김(피아노 반주자)

2009-04-03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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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을 사랑합니다.

겨울 내내 긴긴 비가 축축히 마음과 거리를 적시더니 어느새 인지 살구 나무 벚꽃 나무들이 우리와 상관없이 잔인하리만치 눈이 부시게 화사롭다. 예년 같으면 분주히 꽃도심고 봄나들이 가자고 남편을 졸랐을텐데, 영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남편과 가끔 만나는 친구가 놀러왔다. 둘이 만나면 직장얘기 종교,정치, 스포츠등의 이야기에 열변을 토하더니만 어째 오늘은 분위기가 축축하고 무겁다.

갑작스레 회사가 문을 닫아 직장을 잃고 수심 가득 짊어지고 온 그 친구는 남편과 함께 밤이 늦도록 불안정한 미래로 인해 열심히 뛰었것만 지금 세상이 너무 커다랗게 보여 힘겹고 무섭기조차 하다 한다. 그래서 그동안 버텨왔던 그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표정 관리가 힘들다고 낙심가득 털어놓는 소리가 내 귓가까지 한숨섞여 적셔온다.


전체적인 경제여파에 우리같은 서민은 새우등 터지는 몸살앓이를 겪고 있지만 축쳐진 남편들의 어깨에 활력을 불어주고 함께 버팀목이 되어줘야 되지 않겠나.

요즘 부쩍 남편은 별것 아닌 일로 짜증을 자주 내며 괜시리 아들 녀석의 옷차림에 역정을 낸다.

다른때 같았으면 옆에 있던 내가 한마디 했을 텐데, 부부는 눈빛과 목소리 만으로도 마음을 다 읽을 수 있지 않은가.

“그래, 마음 큰 내가 참는다. 밖에서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으면 편안한 집에서 해대는 이정도의 불평쯤은 넉넉한 내가 다 받아주지 뭐 까짓거.”

하루 종일 밖에서 몹시 고단했던지 코를 어찌나 곯아대는 통에 밤을 하얗게 새워본다. 그래도 밉기는 커녕 가슴이 시려오는건 함께 우여곡절을 겪은 희노애락 일까.

가장 힘들때 힘이 되어주는 친구가 진정 부부 아니겠는가.
올 사월이면 남편과 어느덧 20주년 결혼기념일이 된다. 그동안 한번도 쉬지않고 한 가정의 가장이란 짐을 지고 열심히 살아온 남편을 위해 부끄럽지만 고맙다는 생각에 문득 감히 ‘여성의 창’을 통해 시를 선물하고 싶어 지면을 채워본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세상을 움켜쥔양 밤새도록 나라걱정에 논쟁을 벌이고
문학과 철학과 사랑 그리고 감당못할 청춘을
소주 한 잔에 담아 기울이던 당신을 사랑합니다.

세상걱정 시국걱정은 고사하고 조그마한 가정도
끌어가기 벅차다고 한숨쉬는 쓸쓸한 어깨를 지닌
한가정의 가장인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느덧 굵어진 주름속에
사랑과 분노와 원망이 범벅이 되어 함께 걸어온 나날들이
소중한 사연으로 엮어진 당신을 사랑합니다.

남은 인생 넉넉한 웃음으로 한 곳을 바라보며
힘없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함께 걸어줄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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