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희봉 칼럼 / 명가(名家)의 꿈

2009-03-10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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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수필가)

아내와 나는 둘 다 맏이다. 우리가 30여 년 전 미국에 이주한 후, 서울 조카들 다섯은 몇 년 터울을 두고 모두 우리 집으로 조기유학을 왔다. 아내는 이들을 두 아들과 함께 친자식처럼 키웠다. 매일 더운밥 먹이고, 과외 활동 마다 차로 실어 나르기를 꼬박 10년. 이젠 하나씩 대학을 졸업하고 어엿한 사회초년생들이 됐다. 엄마 같은 이모라고 명절 때마다 인사하러 모인다.


올 정초에도 다 모였다. 집안이 그득하다. 아내는 조카들 하나 하나에게 새 별명을 지어주고 준비한 지혜의 글을 읽어준다. 어디선가 구한 작자미상의 글에다 자기생각을 가미했는데 가슴에 와 닿는 잠언이다.

어릴 때 큰조카의 별명은 배추였다. 큰 머리통에 고집도 세 미국생활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은 터였다. 이제 장성한 그를 아내는 새 별명, ‘명품배추’로 부른다. 겉절이 인생이 아닌 김치 인생을 살아라, 김치가 맛을 제대로 내려면 배추가 다섯 번 죽어야한다. 땅에서 뽑힐 때 한번 죽고, 통배추의 배가 갈라지면서 또 한 번 죽고, 소금에 절여지면서 죽고, 매운 고춧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이 돼서 또 죽고, 마지막으로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 다시 한 번 죽어야 비로소 제 맛을 낸다. 그 깊은 맛을 전하는 인생을 살아라. 그러기 위해 오늘도 성질을 죽이고 편견을 줄이며 살아라.

둘째 녀석은 숫기가 없다. 25살인데 아직 연애한번 못했다. 그의 새 별명은 ‘섭씨 100도’다. 99도가 아닌 100도 사랑으로 살아라. 속담에 ‘밥은 봄처럼, 국은 여름처럼, 장은 가을처럼, 술은 겨울처럼’ 이란 말이 있다. 모든 음식에는 적정온도가 있기 마련이다. 사랑에도 온도가 있다. 그 온도는 섭씨 100도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99도에서 멈춰버린다. 기왕 사랑하려면 끓어오르는 비등점까지 사랑해라.

조카들 중 제일 리더쉽이 있는 셋째 녀석을 아내는 ‘병아리 CEO’라고 부른다. 계란 후라이가 아닌 햇병아리로 태어나라.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면 생명으로 부활하지만, 남이 깰 때까지 기다리면 계란 후라이 밖에 안 된다. 뱀도 허물을 벗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지 않는가? 남이 너를 깨뜨릴 때까지 기다리는 건 비참한 일이다. 관습의 틀을 벗고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력 있는 CEO가 돼라.

머리 좋은 넷째 조카는 의대진학에 이태 째 실패했다. 그의 새 별명은 ‘닥터 오뚜기’다. 거북이보다 오뚜기가 돼라. 돌팔매질을 당하면 그 돌들로 성을 쌓아라. 너는 쓰러지지 않는 게 꿈이 아니라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게 꿈이 돼라. 한번 넘어지면 누군가 뒤집어 줘야하는 거북이 보다 넘어져도 우뚝 서는 오뚜기로 살아라. 신은 실패자는 쓰셔도 포기자는 안 쓰신다.

아내는 막내 딸 조카에게도 한 말씀하신다. 암사자가 아닌 낙타로 살아라. 사막을 건너는 건, 용맹한 사자가 아니라 못생긴 낙타다.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키듯, 우리의 식탁을 가득 채우는 건 고래가 아니라 새우다. 낙타무릎처럼 가족을 위해 평생 무릎 끓고 기도하는 에미가 되어라.

아내는 얌전히 서 있는 날 쳐다본다. 내게도 할 말이 많은 모양이다. 바짝 긴장된다. 세상보다 가정의 성공을 우선하세요. 가정은 사랑의 기업입니다. 자식은 벤처기업과도 같지요. 자녀들의 영웅이 된다는 건 신의 큰 축복입니다. 무엇보다 자녀들에게 멋진 추억과 좋은 습관을 물려주세요. 그리고 아내에게서 이런 말을 듣도록 노력하세요. 당신이야말로 둘도 없는 명품남편이었다고.

아내 덕에 평범한 우리 가족들은 모일 때마다 명가(名家)의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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