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교단일기 / 송일란(SV한국학교 교사)

2009-01-30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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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아이들이 다 빠져나간 텅 빈 교실에 우두커니 서서 아이들의 책상을 하나씩 하나씩 바라다본다. 아이들은 자리를 정해 주지도 않았는데 자기 자리를 정해 놓고 늘 앉는 자리에만 앉았었다. 남녀가 내외를 하는지 여학생 남학생 딱 나뉘어서는 앉곤 했다. 책상 하나를 바라보면 한 학생이 떠오르고 다른 책상으로 눈을 돌리면 다른 학생이 떠오른다. 방금 나간 아이들의 모습이 아니고 처음 이 교실로 들어오던 호기심 가득하고 아직은 본색을 드러내지 않은 얌전한 모습의 아이들이 떠오른다. 무서운 선생님이 아닐까 탐색하던 눈빛들까지. 그러던 아이들이 1년을 같이 지내면서 선생님께 농담을 건네고 나이를 캐묻던 담대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내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을 가던 기차 안에서 깜깜한 굴만 지나가면 선생님들을 골탕 먹이던 그 담대했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남자 선생님 머리까지 묶어 놓았었는데 굴을 빠져나와 머리 묶인 모습으로도 학생들을 야단치기는커녕 같이 그 우스꽝스럽던 모습으로 사진까지 찍으셨는데.

오늘 수업 시간에 윷놀이하면서 더 재미있게 망가져 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 순간의 망가짐이 아이들에게 추억의 명장면으로 기억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이들의 행동만 변화된 것이 아니다. 드디어 사춘기에 진입해 표정도 심드렁하게 바뀐 학생도 있고 말끝마다 도전적이고 나름대로 인생관을 펼치던 학생도 있었다. 깨질 듯 유리 같던 아이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 주었는지 두려운 마음도 든다.

1년 전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학생들도 많다. 내가 보기에도 아가씨 같고, 아름다운 청년 같으니 부모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기특하고 사랑스러울까. 아이들 처음 만난 순간과 오늘 교실을 떠난 아이들을 사진 찍어 비교해 보면 어릴 적 돌 사진을 보듯이 흐뭇할 것 같다. 추억을 같이 나눈 사람들과의 사진은 언제나 훈훈하고 정겨우니까.

교실은 그대로인데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커서 이 자리를 떠났다.
다음 주면 서울반 졸업식이다. 실리콘밸리 한국학교 서울반은 한국의 학사일정과 같으며 교과서도 한국 교과서를 쓰고 있다. 그래서 중간에 이렇게 툭 졸업식이 있는데 학생들보다는 선생님들이 더 아쉬움이 많은 듯하다.

하긴 나도 고등학교 졸업식조차 가기 싫었는데 억지 춘향으로 갔었다. 반항이라도 하듯 졸업식 전에 단발이 규칙이던 머리를 샤사삭 바람머리로 자르고 발걸음도 가볍게 졸업식에 그야말로 들렀었다. 어른이 된다는, 대학생이 된다는 들뜬 마음으로 졸업식 순서는 지겹기만 했고 선생님들께 조신하게 인사도 하지 않고 나왔었다. 감옥 같았던 학교, 내 다시는 돌아보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떠나왔었다. 졸업증명서를 떼러 대학 졸업 후 찾아갔을 때도 선생님들을 피해서 살짝 다녀왔었다. 지금 이렇게 세월이 지나고 나니 선생님들의 마음이 헤아려지고 철부지 내 행동이 부끄럽다.

하지만 어리다는 것은 다 그렇다. 돌아보는 것도 서툴고 앞을 내다보는 것도 어리석다. 우리 반 학생들도 그럴 것이다.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좇아가는 것만으로도 바쁠 것이다. 1년 사이에 있었던 나눔의 시간들을 곰삭이고 들춰보기에는 아이들은 너무 바쁘다. 추억을 되새김질하기에는 너무 젊은 것이다.

사랑에 치사랑은 없고 내리사랑만 있다더니 휑한 교실에 내 사랑만이 앉을 자리 없이 휘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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