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 이희정

2008-12-29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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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 천국

크리스마스 카드를 몇 장 받았다.
그런데 가만 보니, 한국에서 사촌동생이 보낸 카드도 홀마크요, 일본에서 친구가 쓴 카드도 홀마크였다.
후후, 정작 미국에 사는 나는 홀마크가 아닌 다른 것을 보냈건만.

몇 년 전, 무심코 홀마크 가게에 들어갔던 어느 날.
놀라운 카드의 세상,이 내 눈 앞에 와르르 펼쳐졌다.
생일, 기념, 결혼, 감사, 우정, 사랑, 졸업, 입학, 은퇴, 애도……
각양 각색의 카드들을 찬찬히 살펴보는 동안 어이구, 이 바쁜 세상에 누가 이런 걸 시시콜콜 챙길까, 하던 생각은 그래, 정말 세심하게도 잘 만들었다 싶은 감탄으로 바뀌었다.

생일만 해도 그냥 Happy Birthday 가 아니다. 단순히 첫 돌, 환갑,이 아니다. 5살 16살이 따로 있고, 여자용 남자용 애들용 할머니 할아버지용은 물론 직장 상사용 친척용이 따로 있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선두로, 새 해, 발렌타인, 어머니 날, 아버지 날, 이스터, 할로윈 등 많이 알려진 특별한 날은 물론이요, 그냥 네 생각이 나서, 보고 싶어서, 부터 미안하다는 Sorry Card, 몸과 마음이 아플 때 보내는 Get Well Card, 힘 내라는 Support Card 도 있다. 슬픔을 애도하는 Sympathy 카드는 또 얼마나 세분화 되었는지, 남편을 아내를 자녀를 부모를 혹은 친구를 동료를 심지어는 애완동물을 잃었을 때에 보내는 카드가 각각 다르다. 정말 무궁무진한 카드의 천국이 아닐 수 없다.

상황에 맞춰 구구절절 직접 쓰는 게 귀챦은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은 게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나아가 미리 프린트 되어있는 보석같은 말들이 나같은 외국인들에게는 더욱 요긴하다는 거야 말할 필요도 없고.


어쨌거나 미국은 카드 문화에 있어서 우리랑은 확실히 다른 구석이 있다. 어느 그로서리를 가도 한 쪽 통로는 반드시 카드와 선물 포장용품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온 국민의 카드화,라고 한다면 비약일까? 아이의 생일 파티에는, 생일 전 초대장과 생일 후 Thank you Card 가 필수다. 선생님 생일에 선물은 없을망정 카드는 꼭 챙겨 보낸다. 음…우리도 결혼 전후로 청첩장과 답례장을 보내긴 하는구나. 하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간소화되어 이메일이나 전화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 싶다. 어찌보면 지나친 카드의 홍수가 일면 낭비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받을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카드를 직접 고르고, 쓰고(비록 맨 밑에 사인만 할 지라도), 전해주는 마음이 총알처럼 쏘아대는 이메일 보다 훨씬 인간적인 건 사실이다.

언젠가, 생일날 케잌과 촛불이 그려져있는 카드를 받은 적이 있었다. 열어보니 안에 조그맣게 thank you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닌가!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그 아줌마가, 미국의 복잡한 카드 문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림만 보고 집어 들었던 탓에 생긴 실수였다. 무안해할까봐 차마 말은 못했지만, 그 아줌마도 차차 알아가겠지.

한 동안은 예쁜 카드가 좋아서 이 일 저 일을 예상해서 미리미리 카드를 사두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카드 값이 그다치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그 후로는 그냥 어지간한 그림의 blank card를 넉넉히 사서 필요할 때마다 쓰고 있다. 선물을 받았는데 아무리 탈탈 털어봐도 카드는 커녕 쪽지 하나 찾을 수 없을 때 느낀 기이한 허탈감,을 누구나 한번쯤 경험했을 테다. 그래서 난 카드를 꼭 쓴다. 선물이 부실하다 싶을 수록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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