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 이희정(주부)

2008-11-24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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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면조보다 배부른“

우리네 추석처럼 많은 사람들이 어딘가로 떠나고 어디선가 돌아오는 추수감사절이다. 한 해는 시댁으로 한 해는 친정으로 번갈아 여행을 떠난다는 낸시 아줌마, 한 해는 동서네서 한 해는 형님네서 번갈아 모임을 가진다는 케일리 엄마, 디즈니 랜드를 갈 꺼라는 아무개씨 네, 새벽에 줄서서 큰 거 하나 건지겠다는 아무개 언니 등등 하여간 모두들 들썩거리며 바삐 움직이는 때다.

달력의 노는 날이 반갑기는 커녕 괴로움의 씨앗이 된 것은 아마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지 싶다. 사실 명절은, 특히 추수감사절은 뜨내기 외국인인 우리 가족이 천애고아가 되는 기간이다. 오랜만에 만나 따스함을 나눌 일가 친척이 있길 하나, 종교로 맺어진 굳건한 인연이 있길 하나, 그래서 그저 오롯이 네 식구가 편안하게 며칠 뒹굴거리는 게 전부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유학생 신분인 남편을 따라 미국에 왔을 때, 학교 사무실에서 host family 를 신청할 수 있는 작은 엽서를 받았다. 미국 가정과 일종의 자매결연을 맺어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대개는 신청자(외국 학생들)가 자원봉사자(미국 가정)보다 많아 한 두달쯤 기다려야 순서가 돌아오곤 했다. 우리가 운좋게도 엘리스 아줌마를 만난 건 이맘 때였다. 월마트에서 일하는 아줌마와 지역 신문을 배달하는 빌 아저씨, 두 분이 호스트 패밀리를 시작하신 건 큰 딸이 결혼과 함께 근처 도시로 이사가고 대학에 입학한 아들이 다른 주로 떠나던 무렵이었다고 했다. 두 분은 우리 말고도 벌써 타이완, 중국, 베트남 등의 학생들과 인연을 맺고 계셨다.


어느 땡스기빙 연휴, 슈퍼며 비디오 가게마저 문을 닫아 아쉽던 그런 나날에 엘리스 아줌마가 우리를 초대해줬다. 자그마한 집에 온갖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자 거실은 아이들과 어른들로 꽉 차버렸다. 오븐에서 갓 나온 커다란 칠면조와 따뜻하고 부드러운 얌 고구마, 포실포실 매쉬드 포테이토와 신선한 샐러드, 노릇노릇 구워진 빵, 그리고 파트락으로 모인 몇 가지 다국적 음식들, 호박파이와 치즈케잌 아이스크림의 마무리까지. 산처럼 쌓이는 접시들과 꼬마들이 소파에 엎지른 콜라도 개의치 않으시며 이 ‘확장된 가족’ - 엘리스 아줌마는 우리 모두를 항상 my expanded family 라고 부르셨다 - 을 이 자리에 함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를 올리던 아줌마 아저씨. 저녁식사를 마치고는, 지하실에서 잠자고 있던 크리스마스 트리를 꺼내 다 같이 부산스레 장식을 하고 사진도 찍고 그랬었는데.

그 때 엘리스 아줌마의 음식은 단언하건대 자기만의 고유 레서피로 만들어 낸 품격있는 요리가 아니었다. 음식의 대부분은 박스나 캔, 또는 냉동실 봉지에서 나와 다만 잘 섞이고 따뜻하게 데워졌을 뿐이었다. 앉을 만한 곳도 적당치 않아 일회용 접시를 들고 엉거주춤 먹어야 했지만, 이 말 저 말 갖가지 언어가 공중에 떠돌아다니는 그 소란스러움도 함께 삼켜야 했지만, 먹고 또 먹어도 그저 입이 즐겁기만 했던 추수감사절 저녁 만찬.
지금 나는 그 때보다 몇 배는 더 고급인 재료를 사다가 레서피의 수순을 밟아가며 잘난척 음식을 만들지만, 이상하게도 그 날 먹었던 그 엉성하기 짝이 없던 음식맛을 낼 수가 없다. 날 한없이 배부르게 만들었던 엘리스 아줌마의 따뜻한 마음만큼은 도저히 흉내낼 수가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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