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꽁트 / 이 동 휘(소설가)

2008-11-18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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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책

정 노인은 공원에서 가끔 노부부가 손잡고 걷는 모습에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건강이 안 좋아 일찍 가버린 아내 생각이 났다. 떠나기 전 좀더 따듯하게 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그때는 왜 그리도 앞만 보고 뛰었을까. 물론 그렇게 뛰었기에 오늘이 있는 것이다. 이젠 하늘도 보고, 뭉게구름도 볼 수 있고, 나무 위로 오르내리는 다람쥐를 보면서 산책을 즐기는 여유도 생겼다. 정 노인의 아내는 가면서 자기의 사랑을 손자들한테 주라고 부탁했다. 한편 정 노인도 아내한테 주지 못한 사랑을 손자한테 곱으로 전해주었다. 이제 손자들이 공부를 마치고 가정을 꾸릴 때까지 살아 있으면 다시 사랑을 줄 마음이다. 정 노인은 요즘 집에서 책 읽고 사색하면서 살아간다.
“이봐요, 늙은이.”
정 노인은 돌아봤다. 웬 늙은 여인네가 연한 핑크 색 츄리닝 복을 입고, 앞창이 넓은 모자를 쓰고 벤치에 앉아 있다. 공원길에서 몇 번 스친 적이 있는 여자 같았다.
“이리와 앉았다 가요.”
여자는 오랜 친구처럼 말을 했다. 정 노인은 서먹서먹한 자세로 벤치에 앉았다.
“이 근방에 살아요?”
여자가 물었다.
“저 아파트 다음 건물에 있어요. 그 쪽은 어디 있소?”
“전, 좀 떨어져 있어요.”
“운전해요?”
“운전하면 이런 후진 곳으로 안 와요.”
“이 공원이 어때서요? 나무도 많고, 넓은 잔디도 있고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영감을 뭐라고 부르죠?”
정 노인은 여자를 빤히 쳐다본다. 화장을 곱게 해 그런지 얼굴이 고와 보인다. 돈 많은 집에서 고생을 모르고 살아온 늙은이 같았다.
“정씨니까 정 노인이라 해요.”
“정 노인. 저는 서 씨예요.”
“왜 혼자 산책하시오?”
“그 영감 먼저 가버렸소.”
“사람은 한번 오면 떠나가고,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니겠소.”
“그래서 오늘 정 노인을 만난 것 같네요. 그런데 부인은?”
“그 할망구, 이 좋은 세상 천천히 구경하고 갈 것이지. 왜 그리도 빨리 갔는지.”
“그럼 서로 말동무나 해요.”
정 노인은 서 여사와 말동무가 될 수 있을까 하고 탐색하듯이 바라본다.
“정 노인은 자녀가 몇이나 돼요?”
“2남 1녀요. 서 여사는?” 1.
“전, 딸만 여섯이요.”
“이왕이면 칠 공주를 낳지 그랬소?”
“그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던데요.”
“그래도 손자들 보는 재미는 있겠소.”
“난 손자들 안 봐요.”
“안 보다니. 없다는 말이요?”
“손자가 장장 한 다즈하고 셋이나 더 있어요.”
자식이 여섯이니까 그 정도는 되겠다는 듯이 정 노인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손자를 안보는 이유가 뭐요?”
“보기야 보죠. 내가 베이비시터를 안 한다는 거지.”
“서 여사. 우리가 그런 일을 해주므로 가정이 화목하고 즐겁지 않소.”
“내 몸 관리하면서 사는 것이 즐거운 것이지 그들까지 걱정해야 하나요?”
“서 여사! 출가 외인이라고 하지만 다 내 가족이 아니요.”
“난 그런 것 몰라요. 정 노인은 손자를 봐줘요?”
“그럼요. 얼마나 귀여운지 하부지, 하부지 하면서 따라 다니고 온갖 재롱을 부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몰라요. 내 자식 키울 때는 몰랐는데 정말 귀엽고 대견해요. 그래서 자식을 보는 것 같아요.”
“정 노인은 자상한 면이 있어 그렇게 잘 하겠네요.”
“서 여사. 이제 옳다 그르다 따져가면서 살 때는 다 지나갔소. 이제 자식들 세대요. 자식들을 바라보면서 따라 가야해요.”
“난 그렇게 못살아요. 내 주장과 권위를 찾아가면서 살아야지.”
“현실은 그렇지 않소. 내가 양보하고 한 걸음 물러서면 가정이 편하고 사회가 편해지는 거요.”
“내 배 아파 가면서 낳아 길렀으면 그만한 보상은 받을 권리가 있다고 봐요.”
“서 여사. 그런 시대는 우리 세대로 끝났소.”
“정 노인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그렇지 않네요.”
“서 여사. 밥숟가락 놓고 나면 다 소용없소. 태양도 떠 있을 때 빛이 있지만 산 넘어가면 캄캄한 어둠밖에 더 있소.”
“그럼 정 노인은 아직도 손자들을 봐주고 있어요?”
“막내아들의 막내가 대학 들어가면서 독립했소.”
“그만큼 해주었으면 자식들하고 살아야죠.”
“나는 내 일이 있고, 그들은 그들 일하면서 서로 베풀면서 사는 것 아니겠소.”
“난 정 노인처럼 혼자 못살아요.”
“혼자도 못살고, 손자들은 안 봐주고. 그 자식은 슈퍼 우먼이라야 되겠소. 서 여사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요.”
“그래요. 난 편하게 살고 있어요.”
“그 편하게 생활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한번 들어봐요.”
“내 먹고싶은 것 먹고, 몸 관리하고, 쇼핑 다니고 그런 거죠.”
“정말 비생산적인 생활을 하네. 건강할 때 손자도 봐주고, 집안 일도 하면 얼마나 좋아요.” 2.
“그런 것은 그들이 할 일이죠.”
“서 여사 보자 하니 먹물은 들은 것 같은데 인성이 없군. 인성 위에 지식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요?”
서 여사는 아무 말 없이 정 노인을 빤히 쳐다본다.
“저 혹시 교편 생활하지 않았소?”
정 노인이 물었다.
“네. 십이 년이나 했죠. 어떻게 알아요?”
“말들으니까 알 것 같네요. 난 이십 년 했소. 교단을 떠나면서 선생이란 이름도 내려놓고 나와서요.”
“그런데 어디서 했소. 억양이 같은 것 같은데.”
“난 말동무라도 할까했는데 그만 두어야겠소. 위아래가 꽉 막혔으니 원.”
“정 노인. 그것이 무슨 말이요?”
“서 여사처럼 이기적인 사람은 난 싫어하니까요. 쉬었다 가요.”
정 노인은 일어나 산책길을 따라 걷는다. 서 여사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 멍하니 바라보다 뭐라고 중얼거린다.
“구닥다리 영감이 이런 멋쟁이 할망구를 왜 싫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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