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월이다. 길고 따갑던 여름햇살이 노루꼬리 만큼 짧아졌다. 흩날리는 낙엽 따라 세월 가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린다. 오늘도 퇴근길에 LA 어머니께 안부전화를 올린다. 아, 아범이냐?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운전 중에 왜 또 전화냐? 하시면서도 내말 할 틈도 없이 즐겁게 하루일을 털어놓으신다.
이태 전 이맘때쯤 LA 동생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왔다. “형, 어머니가 폐에 물이 고여 입원하셨어.” 80평생 마음고생은 심했어도 건강하셨는데 처음 겪는 큰 병고였다. 막 이민 짐을 푼 동생들의 어린 손자들을 몸소 돌보시겠다고 LA로 가신지 십 수년 째, 아플 틈조차 없으셨는데 이젠 조금씩 삶이 몸에 부치시는 가보다. 검사 결과 심장판막 이상으로 피가 폐로 역류해 곧 수술해야한다는 진단이었다.
“아범아, 난 평생 모로 누워 잤단다. 바로 누우면 숨이 차 잘 수가 없었지. 아마도 이 증세는 내가 꽃다운 19살, 고향 원산을 떠날 때부터였던 것 같아. 이화 기숙사로 떠나던 내 손을 부여잡고 우시던 어머니 모습이 생각날 때마다 가슴이 메어 모로 누었지. 38선 넘어 나를 학교에 넣으신 뒤 고향으로 돌아가시던 초로의 아버지께서 3일 후 도착 즉시 전갈 주겠다고 하셨는데.. 결국 60년 동안 연락이 끊어졌지”
어머니의 이 얘기를 곱씹을 때마다 유명한 심장의 정동규 박사의 자전기‘3일의 약속 (The Three Day Promise)’을 떠올리곤 했다. 18살 때, 공산군을 피해 급히 고향을 떠나면서 어머니께 사흘만에 꼭 돌아오리라 약속했지만 끝내 돌아가지 못한 아들의 통한(痛恨) 어린 글이다. 이 책은 천백만 이산가족들의 역사적 증언이자, 특히 우리 가족에겐 동병상련의 위로를 안겨준 가형의 육필친서 같기도 했다.
내가 처음 정 박사님을 만난 건 1995년 여름 백악관 정원에서였다. 당시 잊혀진 전쟁 6.25를 재조명하고, 참전기념비를 링컨 기념관 옆에 세우는 캠페인이 미 의회의 후원으로 벌어질 때였다. 절친했던 북가주 칼스테이트 사회학과 송영인 교수의 권유로 기금사업팀에 동참, 1년여의 각고 끝에 백만 불 모금을 달성하고 송 교수와 헌정식에 초청 받았었다.
정 박사님은 자서전 판매전액인 $450,000을 따로 기증하신 터였다. 최대 개인 기부자로 백악관 기념전야제에 주빈으로 오셨는데, 기념사업 위원장 스틸웰 퇴역 4성 장군과 나란히 서 계신 그에게 그의 책, ‘3일의 약속’을 들고 다가갔었다.
나는 4백 쪽이 넘는 그의 책을 단숨에 읽고, 깊은 감동과 흥분 속에 몇 일 잠을 설친 사정을 말씀드렸다. 애끓는 사모(思母)의 정과 전쟁통에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자취들을 생생하고 박진감 있게 써 내려간 글에서 우리 어머니 같은 생이별 희생자들의 한 많은 삶을 낱낱이 대변해주신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렸다.
그의 입지전적 생애는 우리 한인교포들에게 큰 귀감이었다. 전쟁통에 중고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29세에 도미하셨음에도, 타고난 재능과 불굴의 투지로 미 전문의의 꿈과 함께 유려한 영문으로 자서전 출판까지 하신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책 판매의 돌파구를 만든 그의 지혜였다. 탈고 후 아무 출판사도 받아 주지 않자 미 전국 1200개 신문에 9천5백만 독자를 가진 ‘디어 에비’칼럼리스트 반 뷰란 씨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반 뷰란씨는 그를 적극적으로 후원, 하루 수만 통의 편지와 책 주문이 쇄도했다. 그리고 전액을 한국전기념비 건립에 기부한 것이다.
좋은 인연은 돌아서 찾아오는 것일까? 이년 전, 롱비치 병원에서 수술을 무사히 받은 어머니가 심장내과 주치의로 선정 받은 분이 정 박사님이셨다. 고희를 훨씬 넘긴 연세에도 청년처럼 밝고 적극적인 성격은 여전하시다고 한다. 어머니는 요즘도 박사님께 정기 진료를 받고 고향얘기 나누고 오시는 게 큰 행복이시다. 나의 행복은 3일의 약속처럼 적어도 사흘에 한번은 안부전화를 올려 낭랑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