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은 소중한 것. 오늘의 ‘나’를 있게 한다. 누구와의 만남이 어찌 내 뜻, 내 힘대로일까? ‘하늘의 뜻’일래라. 삶의 자리에서 마주하고 있는 ‘너’. 오늘의 나를 있게 하는 짝, 바로 그 너와 나의 만남과 우리의 나눔이 함께 어우러져 이루는 살림. 하늘 아래 단 한번 있어야 하는 ‘삶’이다. 하늘의 뜻이 아니라해도 그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당신“(서정춘)
“당신, 돌로 던져서 쫓아버릴 수 없고 / 당신, 칼로 베혀서 져버릴 수 없다.
차마, 사랑은 물로 된 육체더라.”
간결한 한 편의 시다. 사랑은 정녕 ‘물로 된 육체’련가. 질기고 칙칙하다. 땀냄새 배인 살내음이 설인다. 온 몸의 힘이 쭉 빠진다. 나른해 진다. 천 겁(劫) 만 겁 얽힌 인연인가 눈을 감는다. 그래서 읽고 또 읽다, 이 ‘시’를 소개한 정호승 시인의 평에 눈길이 꽂힌다.
“한 인간이 진정 사랑을 깨닫게 될 때는 언제일까. 불행히도 대부분 사랑이 끝났을 때다. 사랑이 끝났을 때 비로소 사랑을 깨닫고 소중히 여기나 때는 이미 늦은 때이다. 더구나 사랑이 끝나고 나서도 사랑을 깨닫지 못할 때도 있어 사는게 슬프다. 나는 죽을 때까지 사랑을 깨닫지 못하게 될까봐 두렵다. 아니, 죽고 나서도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될까봐 어쩌면 죽을 수가 없을 것 같다.” 피말리는 독백이다. 작가보다 더한 홍역을 치루고 있다.
그래서 또 한번 읽게 된다. 어쩌면 그럴 것 같다. 삶이 그런 것인가. 사랑보다 두려움이 온 몸을 휘감는다. 사랑만이 사랑과 함께 할 수 있는 것. 나도 ‘사랑을 모르지’생각하니 두렵다. 행여 받는 사랑을 헛되게 할까봐 더욱 두렵다. 큰 사랑 저버리고 미움과 저주와 증오의 시험에 들까봐 더더욱 두렵다. 밟히는 이런 저런 아픔들이 온 몸의 피멍되어 절여 올 때면 “죽을 때까지 사랑을 깨닫지 못하게 될까봐” 가위에 눌리게 된다. 모두가 내 탓이다.
나도 모르게 ‘나’를 뒤돌아 본다. 한 발 뒤로 물러나 물어 본다. 어떤 ‘나’인가. 잘 알 수야 없지만, 먼저 스스로에게 “내 몸이 나”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내 몸은 내가 잠시 쉬어 가는 집이나, 몸을 가리는 옷”이라 생각하는가? 물어 본다. 그래 또 한 편의 시를 편다.
“하늘에 쓰네”(고정희)
“그대를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 하늘에 쓰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함은 /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땃기 때문이리니“
쉬워 훨씬 좋다. 돌도, 칼도 필요 없다. 바람이 없기에 아쉬움이 없다. 오늘, 당장이 아니기에 마음 편히 쉴 수 있어 더욱 좋다. 당신과는 상관없이 아주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할 수 있어 더더욱 좋다. 확실히 사람은 천차만별이다. 얼굴이야 닮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자기 ‘한 몸’뿐이다. 분명, 내 몸(육체)이 나는 아니라 해도 ‘자기’만이 자기가 원하는 ‘당신’과 마주한다. 그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의 크기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는 온전히 내가 취하고 택할 몫이다. 내 눈 높이, 내가 선 그 자리에 ‘당신’이 서 있다는 말이다. 어찌 보면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 ‘당신과 나’이며 ‘사랑’이고 ‘삶’이 아닐까 물어 보게 된다.
다시 정호승 시인의 속삭임에 귀기울여 본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헌신의 대상을 발견하는 것…. 그 대상에 대해 헌신을 다하는 것. 그러나 헌신을 다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사랑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랑이 없으면 헌신이란 있을 수 없다.”
10월 어느 날, 조용히 머물러 당신의 사랑과 삶과 헌신이 하나인지 둘인지 아니면 셋인지 바로 ‘당신’에게 물어 보지 않으실런지… 모두의 평화를 빕니다.
1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