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경기로 학비부담 늘면서 은퇴 한인노인들 고민거리
“노후생활에 대비해 적립해 둔 은퇴자금을 손자의 대학 학비로 내놓게 생겼으니 어쩌면 좋을까요?
젊은 날 열심히 수고하며 일한 뒤 은퇴하는 한인노인들이 요즘 주머니 관리에 고민이 쌓여가고 있다. 불경기로 얇아진 주머니 사정 탓에 자녀의 대학 등록금을 미리 적립할 만큼 여유 있는 학부모들이 줄어들면서 조부모에게 손자의 대학 학비를 보태달라고 손을 벌리는 한인 가정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올 여름 20년간 운영하던 작은 자영업체를 매각하고 은퇴한 70대 초반의 황모씨 부부도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 가게를 정리하기가 무섭게 큰 아들부터 둘째 아들, 막내딸까지 삼남매가 하나둘씩 찾아와 슬금슬금 손자들 학비 문제를 고민거리로 풀어놓으며 부부의 눈치를 살피고 있기 때
문이다.
손자사랑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황씨 부부지만 손자가 한두 명도 아닌데다 특정 손자만 도와줄 수도 없는 형편이라 고민에 빠졌다. 자칫 삼남매에 줄줄이 달린 손자들을 차별이라도 했다는 오해를 받기 쉽고 괜히 가정에 불화라도 생길까 걱정돼 아직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황씨 부부는 “이민 초기 실컷 고생만 한 아내와 비록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소박한 은퇴생활을 즐길 수 있을 만큼의 여윳돈을 모은 것이 고작이다. 고생하는 자식이 가여워 주머니를 열자니 불안한 노후생활이 걱정스럽고, 움켜쥐자니 야박한 할아버지·할머니라고 손가락질 할 것만 같
아 솔직히 겁이 난다”며 “알고 보니 주변에 비슷한 고민을 하며 남몰래 속앓이 하는 노인들이 꽤 있더라”고 귀띔했다.
이 같은 상황은 비단 한인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미국 사회도 불경기가 지속되면서 여기저기서 조부모의 지갑에만 눈독을 들이는 자녀와 손자손녀들이 늘고 있다. 워싱턴 DC에 본부를 둔 비영리기관 ‘칼리지 세이빙스 재단’이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자녀의 대학 학자금을 미리 적립하는 부모들은 갈수록 줄고 있는 반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부모들은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8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43%는 실제로 대학 학비 적립금이 전무하다고 밝혀 지난해 27%보다 무려 60% 포인트 늘었다.
또한 친구나 친척에게 생일선물 대신 학자금 적립금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학부모는 35%에 달했으며 조부모를 통해 자녀의 학비 납부에 실제로 도움을 받는 학부모들도 22%에 달했다. 재단은 연간 대학 등록금과 기숙사 비용 등의 5% 인상률을 감안, 향후 15년 후에는 4년제 공립대학을 졸업하는데 10만 달러 이상이, 4년제 사립대학은 20만 달러 이상이 필요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어 부모들뿐만 아니라 나이든 조부모들도 대학 등록금 걱정에서 해방되기가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이정은 기자> juliannelee@koreatimes.com
A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