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창 / 이주연
2008-08-22 (금) 12:00:00
나는 나이 사십이 넘은 늦깍이 학생이다. 모두들 무슨 원대한 꿈이라도 있나보다 아니면 공부에 한이라도 맺혔나보다 추측하겠지만 이유가 그리 거창하지는 않다. 어느 날, 미국으로 이주를 해야만했고 게중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이 학생비자이다보니 그냥 학생이 되었을 뿐이다. 집안에만 있다보니 가끔씩 공부를 많이 하거나 전문직을 가진 폼나는 친구들을 볼때면 스스로가 초라해보인다는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다시 공부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른이 되어서도 자주 종이 울려도 시험지 답안을 채우지 못해 절절 매는 꿈을 꿀 때가 많았는데 그 때마다 잠이 깨어 그 꿈이 현실이 아님을 내가 더 이상 학생이 아님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하던 공부도 접어야 할 이 나이에 공부를 다시 시작하다니...
신분 유지를 위해 평점 C만 받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처음엔 쉬엄쉬엄 하려했다. 하지만 아들녀석에게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라고 잔소리를 해대면서 대충 하자니 웬지 마음이 켕겼다. 게다가 내가 미국 학생들의 열배나 되는 등록금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론 너무나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어영부영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주부이다보니 “돈”에 관련된 후자쪽 이유가 더 강하게 다가왔지 싶다. 콩나물값 일이백원을 깎으려 온갖 수모도 불사하는 대한의 아줌마가 어마어마한 돈을 미국땅에 쏟아부으며 본전은 뽑아야지 싶었다. 그래서 이왕 하는거 제대로 하자 결심하고 죽기살기로 매달렸는데 그게 생각같이 쉽지가 않았다.
공부도 때가 있는 법이라고 학생때 열심히 하라시던 어르신들 말씀이 하나 틀린게 없었다. 숙제 좀 할라치면 금새 식사 준비를 해야하고 시험이 잡힌 날이면 의례 아들 학교의 행사 안내장도 같이 날아들었다. 공부하는 시간을 아껴보고자 부엌 벽을 온통 단어장으로 도배를 해두었으나 그도 돌아서면 금새 잊어버리기가 일수여서 별 효험이 없었다. 일인 다역을 하자니 지난 학기 내내 하루 4-5시간을 넘겨 자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늦은 나이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내 자신이 처량해 보이기도 하고 너무 힘이 들기도 하여 그만두고 싶을 때가 여러번 있었다. 하지만 어려울때마다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한국에서는 몸이 약해서 힘든 일은 커녕 하루 쇼핑만 나갔다와도 삼박 사일은 시름시름 앓아누워있어야 하던 내가 이런 힘든 시간들에도 불구하고 크게 아프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던 건 분명히 내 안 어딘가에 내가 생각지도 못한 강한 힘과 바램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어느 새 솥뚜껑 운전사인 내가 살림 말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려나 하던 부정적인 생각이 조금씩 사라지고 언젠가 더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커져갔다. 하지만 사람인지라 아직도 하루에 열두번씩 할 수 있다는 생각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엎치락 뒷치락한다. 그럴 때 마다 자기 최면을 건다. “넌 할 수 있어!칼을 꺼냈으면 무우라도 썰어야지!”라고. 이제 또 새 학기가 시작된다. 몇 배는 더 긴장된 생활을 하게 될 듯 싶지만 과감하게 ESL과목이 아닌 일반 과목을 신청했다. 그럼 이제 슬슬 무우를 썰어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