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흔들리는 막차

2008-08-05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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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효남 (워싱턴 문인회)

조기은퇴한 친구를 만나 술 한 병을 나누고
다운타운 부르크린 역에서
메트로 막차를 탔습니다
꿈에서 막 돌아 나온
비누냄새 가시지 않은 맑은 손들
무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움켜쥐었던 손들
방금 누구의 따귀를 올려붙이고
아직 부르르 떠는 손
입원비를 담은 가난한 지갑을 찢고 뒤진 손
그 손들,
흔들리는 생의 무게를 잡아주던 손잡이들
파업한 푸줏간의 빈 갈고리처럼 흔들리고
종종거리던 바쁜 시간이 담겼던 종이컵은
밟혀 바닥에 누웠습니다

포장한 친구의 말과 같이
무채색으로 흘려보낸 쓴 술
몸 안의 거친 레일을 지나
흔들리며 붉은색으로 깨어납니다
적색의 경고등 불빛 속으로 깨어나는
내가 쉽게 이름을 불러 나열할 수 있는 시간
지하를 달리는 속도는
창밖의 어둠에 지워지고
그 까만 창 너머 잊혔던 얼굴들이
광고의 연결처럼 나타났다 스러집니다
스치는 역마다 늘어진 불빛이
마지막 남은 사람들을 막차로 밀어 넣습니다
빠끔히 열린 칸막이 문 저쪽으로
반쯤 벗겨진 머리가 졸고 있습니다
정차할 적마다 흘러내린 머리를 세우며
정거장 수를 카운트다운하고 있습니다

풍경이 삭제된 하루를 건너
어렵사리 막차에 몸을 실은 사람들
편도의 막차를 타고
스스로 풍경이 되어 저물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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