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인광장- 린 온 미

2008-05-2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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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에는 고통이 있어요
슬픔도 있고요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곧 깨닫게 되지요
우리에겐 항상 내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당신이 약해질 때 내 어깨에 기대세요
내가 친구가 되어 드릴께요
당신을 도와줄께요
내 어깨에 기대세요.

빌 위더스가 부른 이 노래는 가슴이 따뜻해지고 삶에 희망을 갖게 한다. 그러나 9월의 그 저녁 이후로 이 노래를 들으면 나는 가슴에 예리한 통증을 느낀다.

딸은 이 린온미 노래를 무척 좋아했다. 숙제를 하면서도 듣고 친구와 전화로 수다를 떨면서도 들었다. 9월의 어느 어스름 저녁, 어디선가 이 노래가 들려왔다. 한 달음에 달려가 딸의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주 전에 대학으로 떠난 딸이 거기 있을 리 없었다. 노래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 왔다. 딸이 쓰던 카셋 플레이어를 가만히 만져 보았다 전원이 꺼져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가슴에 예리한 통증이 왔다.

딸을 동부의 대학에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시차 관계로 LA는 자정에 가까운 늦은 시각이었다. 공항에 주차해 두었던 차를 찾아서 인적 드문 팔로스 버디스의 크렌셔 길을 오르는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 이게 실제로 일어난 일일까? 아, 어쩌자고 딸을 그 먼 곳에 두고 왔을까?

지나간 17년 동안 딸이 우리에게 주었던 그 많은 기쁨과 행복한 기억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딸은 미조리 주의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주의 또 다른 이름이 ‘Show me State’인 미조리 주는 그 별명처럼 사람들이 보수적인 편이었지만 인심은 소박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남서쪽으로 30마일 거리에 있는 도시는 풍광이 뛰어나게 수려했다. 도시 전체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오자크 산맥의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풍부한 양의 물로 곳곳에 바닥까지 들여다보이는 아름다운 크릭이 많았다. 딸은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렇게 잔잔히 흐르는 물가에서 낚시를 하는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해질 때까지 모래톱에 앉아서 놀고는 했다.

이렇듯 평온한 딸의 일상을 우리는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살벌한 경쟁터로 옮겨 놓았다. 이제 겨우 영어로 말하기 시작한 딸에게 한국말은 무척이나 생소했다. 그 또래의 유치원 친구들은 모두들 발랄하고 말들도 여간 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매사에 늦되고 늘 조용하던 딸은 점점 더 말수가 적어졌다. 게다가 곧 이어 입학한 사립 초등학교에선 드러내놓고 초빙 과학자들의 자녀들을 경원시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첫째가 외국에서 귀국한 과학자의 자녀들은 한국말을 제대로 못한다. 둘째, 걸핏하면 외국으로 다시 나가거나 장기 출장을 가버리곤 한다. 세째, 그 부모들은 담임선생님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 챙긴다는게 그 이유였다. 사실이 그랬다. 나 역시 선생님들에게 봉투를 건네는데 아주 서툰 엄마였고 아빠를 따라서 6개월씩 외국에 나갔다 들어오면 딸은 애써 배운 한국말을 다 잊어버리곤 했다. 전시도 아닌데 딸은 한국으로 미국으로, 서울로 대전으로 초등학교를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렇게 소위 냉탕 온탕을 반복한 덕분에 딸은 지금 완벽한 이중언어를 구사하지만 어린 시절 힘든 시간을 겪게한 일은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된다.

남편은 딸을 무척 사랑했다. 피천득 선생님의 딸 서영이에 대한 사랑도 그 정도이셨을까?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심방을 오셔서 “집사님 가정은 정말 축복 받은 가정입니다. 학식도 그만하시고 슬하에 스트라이크(아들) 하나와 볼(딸) 하나를 골고루 두시고…” 그러자 남편은 아주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원 스트라이크, 원 볼이라니요? 투 스트라이크지요.” 남편은 딸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조차 안쓰러워했다. 늘 딸에게 “A F C 알지?”라고 말하곤 했다. Aim For C, 즉 성적은 C만 받으면 된다고 이르는 말이었다.


딸을 대학에 남겨두고 LA로 돌아오던 날, 기숙사 앞에서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 타기 전 “케런, A F C 알지?”하며 남편은 딸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지금 막 대학 생활을 시작하는 자식에게 그런 격려(?)를 하는 아빠는 둘도 없을 게다. 딸이 결혼해서 워싱톤 DC로 떠나던 날에는 린온미의 노래가 들리지 않는데도 예의 그 통증을 느꼈다. 이제 딸이 그 어깨에 기댈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게 되었는데도 통증은 수시로 찾아왔다
지난 10월에 돌잡이 아들을 안고 딸네가 LA에 왔다. 이주 먼저 태어난 제 사촌과 합동으로 돌잔치를 하기 위해서였다. 친손자와 외손자를 양 옆에 앉히고 행복하고 떠들썩하게 돌잔치를 치렀다.

딸네가 다시 DC로 돌아가던 날 텅빈 마음으로 롱비치 공항을 돌아 나오는데 다시 통증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이 통증을 딸의 몫으로 넘겨줄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통증 바구니에서 아픔은 조금 덜어내고 행복을 많이 섞어서 손자를 향한 딸의 가슴으로 넣어주려고 한다. 멀리서 손자의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딸이 조금씩 더 어미다워 가는 모습을 지켜보리라. 손자가 엄마에게서, 엄마가 그 부모로 부터 받았던 것과 똑같은 시랑을 받고, 딸이 우리에게 주었던 그 모든 기쁨과 행복의 시간들을 이제 손자가 고스란히 제 엄마에게 돌려주게 되기를 기도하리라.


박 유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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