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로 보네테 정상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재미산악회원들.
해발 4,370미터에 위치한 레푸지오 플라자 데 물라스 호텔.
“혈압 오르면 큰 일… 한식 금지령 어쩌나”
1-14-08
이젠 요일을 잊어먹고 산다. 베이스캠프까지 오는 어제의 긴 강행군에 오늘은 완전히 푹 쉬는 날이다.
이제는 텐트생활이 많이 적응되는지 어제는 잠을 잘 잔 듯하다. 이곳 산에서는 8시나 돼야 텐트가 훤해지는 것 같다. 약간 어지럽기도 하고 텐트 안이 답답하기도 하고 밖이 춥겠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게 좋을 듯싶어 동네 마실을 다녀볼양으로 중무장을 하고 텐트를 나선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지만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준다.
아직 캠핑장은 잠들이 덜 깼는지 조용한 분위기이다. 캠핑장 배경에 병풍을 두른 듯한 만년설 산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마을 끝에 다다르면 그곳에 도착하겠지 싶어, 걸어 걸어 텐트가 끝나는 지점, 산등성이까지 겨우 겨우 올라가 보니 눈앞에 있을 것 같은 만년설 산은 저 멀리 있는 무지개 같은 존재였다. 그런 산을 확인한 후에야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자리에서 360도 돌아보며 베이스캠프의 경치를 감상해 본다.
이 새벽, 보기만 해도 질리는, 저 높이 보이는 산등성이로 벌써 제 1캠프인 캠프 캐나다(Camp Canada)로 떠나는 사람들의 일행이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트래킹 길로 접어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괜히 코끝이 찡해 오는 감동이 복받친다. 그 어떤 어려움을 온 몸으로 부딪히는 그 사람들의 진실된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다. 내일이면 내가 저기 같은 길을 밟고 지나갈 것이다. (이런 내 모습에 내 자신이 너무 자랑스럽다.)
오늘은 베이스캠프에 있는 의사한테 검사를 받는다고 한다. 한국에서 온 고미영씨팀이 알려준 정보와는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도착한 어제 검사를 받는 줄 알았는데 우리 가이드는 어제는 아무 말이 없었고 오늘 받는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어제는 그 힘든 여정 끝에 검사를 받는다면 분명히 좋은 결과를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고미영씨 팀은 왜 도착한 당일 검사를 받았을까? 아마도 가이드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편리를 봐주는 게 아닐까, 그래서 자기 나라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가이드를 쓰게 만드는 게 아닐까 등등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할 뿐이다. 그 속은 아무도 모르고 그저 당하는 사람만이 억울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제 하루 푹 쉰 후의 검사라 아무 걱정 없이 가이드를 쫓아 검사 장소로 가니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혈압과 산소미터(oximeter)로 측정과 간단한 질문으로 검사가 끝이다. 패스라는 말에 기분이 엄청 좋다. 나와서 다른 사람들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다들 정상이려니 했는데 김 이사님과 최 선생님과 하 약사님이 혈압 수치가 높은 것으로 내일 다시 오라는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 모두가 믿어지지가 않았다. 모두 날씬한 분이고 평소에 혈압으로 전혀 문제가 없으신 분들이라 하셨는데 역시 고소가 있기는 있나 보다.
가이드들 말이 우리가 너무 짜게 먹기 때문이라면 한국 음식을 먹지 말라는 명령이다. 이럴 수가, 즐거운 식사를 위해 그 먼 곳에서부터 싸들고 온 음식을 하나도 먹지 말라니! 그냥 하얀 밥만 해 주어서 우리 반찬하고 먹는다면 저희들이 해주는 음식보다도 소금량이 적을 듯한데 왜 그런 머리는 안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검사가 패스되는 날까지는 한국 음식 먹는 걸 자제하기로 하고 재수생 3분은 오늘부터 본격적인 물고문에 들어가셔야 한다. 물들을 어찌나 열심히들 마셨는지 배가 너무 부르다고 하실 정도이다.
오늘은 쉬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는 날,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호텔에 가 보자는 제안이시다. 아콩카구아가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곳에 호텔이 세워져 있는데 운동 삼아 구경삼아 가 보기로 한다. 호텔 가는 길이니 그렇게 험하지 않으려니 하고 샌들을 신고 출발을 했는데 역시나 산길은 산길이다. 부지기수로 미끄러지고 흙 들어가고 고생고생하며 호텔에 도착하니 나무로 지어진 산장 같은 느낌의 건물이었다.
그래도 이곳에 묵는 사람도 있는 듯 배낭 메고 나오는 사람들한테서 향긋한 비누냄새가 솔솔 나서 얼마나 부러웠는지… 우리 일행은 샤워를 멘도사를 떠나서 한 번도 못했으니 아마도 내 코가 비누냄새를 따라가는 듯하다.
호텔 1층의 넓은 홀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제 각각 자기들이 왔었노라고 알리는 깃발이라든가 그 어떤 표시들이 줄줄이 걸려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 중 재미있었던 것 하나는 아마도 스페인어로 뭔가 열심히 써진 남자용 삼각 면 팬티가 걸려 있어서 한참을 웃었다. 그 전시물 중에서 한글로 써진 표시를 만나니 얼마나 대견하고 반갑던지…
한 이사님이 우리도 질세라 우리 산악회의 명함을 게시판에 벌써 붙여놓으셨다 한다. 누군가 아는 사람이 우리 명함을 보면 가족을 만난 듯 반가울 것을 기대하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의 호텔, 잘 둘러보고 이 호텔보다 더 안락한(?) 우리의 홈 텐트로 돌아왔다.
등정대원들이 페니텐테스 빙하의 녹아내린 사이사이를 헤쳐 나가고 있다.
1-15-08
오늘은 아콩카구아의 정상 부분을 볼 수 있으며, 산의 전체적인 자태를 잘 볼 수 있는 앞산 세로 보네테(Cerro Bonete, 5,004m)에 올라간다고 한다. 적응을 위한 산행이라지만 5,000미터가 넘는 산이니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는 않을 듯하다.
이 산의 특징이 두 걸음 올라가면 한 걸음은 미끄러진다는 자갈길이라더니 정말 그런 코스를 만난 것 같다. 그래도 가이드가 안내해 주는 길은 단단한 길이어서 그런 대로 걸을 만한데 그 길을 조금만 벗어나면 정말 내가 전진을 하는 건지 후퇴를 하는 건지, 그런 자갈들만이 누가 여기다 꼭 부어 놓은 듯한 그런 산의 모습이다.
가는 길에 삐죽삐죽한 빙하의 밭 페니텐테스(Penitentes)를 만났는데 빙하의 녹아내린 사이사이를 헤쳐 나가야만 하는 그런 길도 지나면서 정말 어린아이가 된 듯한 마음이 된다.
정상 가는 길은 정말 산 넘어 강 건너, 빙하까지 건너가며, 길고 긴 지그재그 모양의 산길이 선명하게 보여 질리게 만드는 그런 산을 넘어야 정상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5,000미터가 넘는 산이니 이 산의 높이도 나에게는 초등하는 산이 된다. 그나저나 이게 무슨 적응이란 말인가, 기운 다 빠져 내일 제1 캠프를 갈 수 있을까 몰라?
어쨌든 지그재그 길에서 앞 사람을 보자면 고개를 직각으로 꺾어야 볼 수 있는 그런 급경사가 이어지는 길을 가고 가다보니 정상은 역시나 도달하게 되어 있었고 정말 가이드 말대로 그 경치는 정말 이렇게 힘들게 올라온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기가 막힌 아콩카구아의 자태가 우리 앞에 떡 서 있는 게 아닌가!
아콩산 너 기다려라, 내가 곧 너를 만나러 가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