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교단일기/ 송일란(실리콘밸리 한국학교 교사)

2008-04-18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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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들

눈이 나빠 안경을 쓰는 사람이라면 안경을 처음 쓸 때의 선명한 세상을 기억할 것이다. 늘 보던 것들이 굵은 고딕체인 양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것은 마치 천지개벽과도 같은 느낌이다. 늘 앞에 있던 사람의 얼굴에 점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안경을 끼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변한 것은 내가 안경을 끼었다는 사실인데 마치 세상이 바뀐 것처럼 마음이 요상했다. 세상은 그 자리에 똑같은 모습으로 있었던 것인데 그 전에는 있어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는 생각을 그 때 하게 되었다. 바람이나 중력, 사람의 마음 이런 것들은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들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는 사람은 냉철해 보이지만 사실은 어리석은 것이다.

아이들의 생각과 재능도 있어도 보지 못할 때가 있다. 늘 컴퓨터 게임만 해서 아들과 날마다 전쟁을 치른다는 엄마의 이야기를 학기 초에 듣고 수업에 들어갔다. 과연 그 학생의 손에서 게임기가 떠나지 않는다. 정말 머릿속에 게임에 대한 정보만 들어있어서 기계인간처럼 되는 것은 아닐까 슬슬 걱정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나만의 달력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1월, 2월...이렇게 숫자로 달을 세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담아서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는 학습 활동이었다. 감성적인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까 싶었던 그 학생의 책을 보고는 놀라움을 넘어 감동까지 했다.

‘4월 - 푸르른 잔디에 누워 바람을 느끼며 책을 보는 달’
이렇게 멋질 수가 있을까.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을 곱빼기에 곱빼기로 해 주고 나니 그 뒤로는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잘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 학생에게는 이미 그런 표현의 능력이 있었지만 엄마나 선생님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또 다른 학생은 늘 무표정했다. 적극적이지도 않고 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다. 질문을 해도 우물우물 들리지 않게 단답형으로 대답을 하고 눈빛도 힘이 빠져 있었다. 수업을 듣기는 하는 걸까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웬걸, 글을 써 낸 것을 보고는 또 깜짝 놀랐다. 정확하고 자세하게 묘사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어 글을 쓴 것이다.

이렇게 학생들의 새로운 면을 볼 때마다 안경을 처음 쓸 때의 그 순간처럼 천지개벽의 느낌이다. 그리곤 반성한다. 눈이 나빠서 세상을 제대로 못 보면 안경 하나 달랑 쓰면 되지만 마음이 닫혀서 아이들의 재능과 능력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아이들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것이다. 늘 사랑으로 마음을 열고 아이들을 바라보자고 다짐하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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