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혜찌로 한인 의류상가의 쇼윈도우, 한인들은 브라질 젊은 여성들의 옷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한국정부와 한인 모금으로 설립된 브라질 한국학교. 오른쪽은 브라질 현지교장. 전재실씨가 이사장을 맏고 있다. 왼쪽은 작가 최복림씨.
유행 앞서고 값도 적당 한인제품‘따봉’
한인의류상 대부분 자체 재단공장 갖춰
온가족 함께 고생하며 노력 성공이뤄
한인 힘모아 고교과정까지있는 브라질 한국학교 설립
나는 브라질에 머무는 동안 20여명의 한인들을 인터뷰 했다. 그들로부터 위험한 도시에 왜 살고 있느냐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들은 상파울루에서 사업을 하면서 브라질을 내 나라로 생각하고 살고 있는 충분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고 나는 그들의 판단을 존중했다. 브라질은 문제가 많은 나라지만 돈 벌기 쉬운 땅이다.
브라질의 한인인구는 3만여명.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본 결과 부풀린 숫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 중 약 90%가 상파울루에서 살고 있고 대부분은 의류제품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인들은 브라질 여자 옷 시장, 특히 20~30대 젊은 여성 옷을 지배하고 있다. 일부 상류층은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유럽 명품을 구입하겠지만 중하층 여성들은 유행에 민감하고 가격이 적당한 한인이 만든 옷을 사 입고 있다.
상파울루의 한인 의류상가는 크게 두 곳. 브라스 지역에 있는 제품공장들은 중저가 제품을, 뽕헤찌로 상가는 중상가 의류를 생산해서 소매상에 넘기고 있다. 나는 여러 블럭에 자리 잡고 있는 수많은 한인 의류도매상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브라질에서 큰일을 해 냈구나”하고 감탄했다.
브라질 한인사회도 언뜻 보면 다른 나라 한인사회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어디를 가든 돈 번 사람 있고, 실패해서 다른 나라나 지방으로 내려간 사람 있고, 한국에서 남의 돈 떼어먹고 도망 온 사람 있고, 돈 좀 벌었다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사람 있고, 여러 사람을 만나보면서 옷 장사 해사 큰 돈(어쩌면 몇 천만달러) 번 사람들의 공통점이 보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겨우 밥 먹고 살 정도지요. 큰돈은 뭐”라며 겸손했다.
좀 더 자세히 들어가면 그들은 고생담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성공의 비결은 온 가족이 함께 노력한 결과라고 말했다.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한 가족들은 돈을 벌었습니다. 부모가 방바닥에 엎드려 본을 뜨고 아이들은 소매를 붙잡고 도와주고, 주일 교회 갔다 온 후 열심히 바느질 하고 고객에게 겸손한 사람들은 성공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말했다. “돈 좀 벌었다고 어깨 힘주고 다니던 사람, 종업원들에게 맡겨놓고 낚시 다니고 논 사람, 브라질 사회를 좀 안답시고 다른 사업을 벌이던 사람,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 사람들은 대개 실패했습니다.”
많은 한인 가정들은 브라질에서 태어난 2세들에게 사업을 물려줄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중에는 명문 상파울루 대학을 졸업하고 전문직에 종사했던 사람들도 있다. 어차피 봉급생활로는 승부를 내기 힘들어 비즈니스 단위가 큰 부모의 사업을 떠맡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브라질 한인회의 박동수 회장(왼쪽)과 김득열 이사장.
브라질 한인사회에서는 1960년대 배 타고 이민 온 사람들을 ‘해군사관학교 출신’ 그 이후 비행기 타고 온 이들을 ‘공군사관학교 출신’이라고 구분한다. 브라질 한인 이민사 편찬 작업을 준비하고 있는 정하원씨는 1963년 2월12일 농업이민 17세대 103명이 부산에서 배를 타고 브라질 땅을 처음으로 밟았다고 말했다. 당시 5·16 군사혁명의 반대편에 섰던 군 출신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같은 해 10월 독신자 가족 150여명이 산토스항에 2차로 들어왔고 이어 68세대가 빅토리아항에 배를 타고 왔다. 1964년 10월에 독일계 이민 브로커 까오사 이민으로 300여명이 들어왔고 이어 볼리비아를 통한 이민자들이 들어왔다.
브라질 한인사회에는 파라과이 출신이 많다. 정식으로 브라질에 들어온 한인들은 이들을 ‘도강파’라고 부르고 있다. 브라질 한인사회는 의류업의 호경기를 타고 가족초청 이민이 많았으나 북미로 빠져나간 사람이 많아 전체적으로 한인수는 증가하지 않고 있다.
브라질 한인사회는 1979년 깜부시게 2층 건물을 매입해 한인회관을 마련했다. 회관에는 1층 사무실, 2층 넓은 강당이 있다. 현 회장은 박동수씨. 김덕열씨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김덕열 이사장은 남미 인접 국가의 한인사회들과 폭넓은 교류를 갖고 있다. 그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에 1만5,000명 정도, 칠레에 1,300여명, 볼리비아에 1,000명 정도, 콜롬비아·에콰도르·가이아나에 각각 수백명이 살고 있고 파라과이의 한인 수는 한 때 2만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3,000명 정도 남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브라질 한인들의 고민거리는 자녀 교육. 공립학교가 형편없어 학비 부담이 크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사립을 보내야 하는데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학생 1인당 한 달에 260달러, 중·고등학교는 학교 등급에 따라 좋은 학교는 한달에 1,000달러 정도 필요하다. 브라질의 교육제도의 특징은 입학은 쉬우나 졸업이 어려운 것. 초등학교 때부터 낙제시킨다. 우수한 중·고등학교 대학일수록 낙제가 심해 졸업을 못하고 다른 학교를 기웃거리는 학생들이 많다.
브라질에도 불법 체류자가 많은데 이들의 자녀들은 입학은 가능하지만 공·사립 모두 졸업은 시키지 않는다. 브라질 인구 중 문맹이 많고 전반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은 것은 공립학교의 부실이 큰 원인이다.
브라질 한인사회는 1972년 한국 정부와 한인사회의 힘으로 800만달러를 모아 브라질 한국학교라는 정규 사립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오전에는 브라질 현지 교사들이 브라질 말로 정규 교육을 실시하고 오후에는 한인 교사들이 한글학교를 운영한다.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대부분은 이민 온지 얼마 안 되는 한인 학생인데 브라질 정부에서 인가한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이기 때문에 정식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
오후 한국학교에서 한국어와 영어 보충수업을 실시하므로 특별히 과외수업을 받을 필요는 없다. 학교시설이 훌륭하고 한국 교육부가 지원하고 2명의 교사를 파견하고 있다.
상파울루에서 만난 한인 2세들은 미국의 2세들보다 더 한국적으로 보였다. 부모 사업을 승계하고 같이 생활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브라질에 사는 한인들은 평안해 보였다. 돈도 우리보다 쉽게 버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은 등 붙이고 수십년간 살아온 브라질이 좋다고 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마찬가지인 줄 모른다. 우리가 해외에 나와 사는 것은 그 시대가 요구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