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피니언] 김웅수 회고록-제2 인생을 걷게 한 5.16 (14)

2008-03-13 (목) 12:00:00
크게 작게

▶ 김웅수 예비역 소장, 경제학 박사

임시 석방

하루는 옆 감방에서 벽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혁신계 구속으로 입소돼온 윤길중 씨였다. 그는 당시 혁신계 간부였으며 사위도 검거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군의 고위 지휘관으로 있던 자로서 많은 사람이 다치고 있음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는 때때로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며 남산에 올라가 봅시다 하고 감방 안에서 선 자리에서 같이 뛰기를 권해주었으며 이 기회에 한시라도 지어보라며 필요하면 자기가 시 짓기를 도와주겠노라 제안하였다. 나는 문학과 낭만의 길에서 먼 탓인지 이 좋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였으나 고맙게 생각하였다. 후일 들은 이야기로는 그는 일제하 고등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과정에 2년 연장 수업)를 나와 독학으로 고등 고시까지 합격한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그는 후일 전두환 대통령이 만든 민정당 대표를 지냈다. 유감스럽게도 잠시의 감방의 대화를 제외하고는 그를 한 번도 상봉할 기회를 못 가졌다.
11월 하순경으로 생각이 난다. 헌병사령부에 있던 혁명 검찰부에 불려
나갔다. 석방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도 무슨 죄목으로 기소되고 무슨 조건으로 석방된다는 것인지 설명도 못 들었고 문의도 하지 않았다. 지금 되돌아보면 제대로 법의 보호나 권한도 허용되지 못한 셈이다. 집이 그리웠고 겨울을 감방에서 지낼 필요 없으니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아내와 김희양 전 부관이 마중 나왔다. 아내는 나를 차에 싣고 시내로 들어갔다. 7살이며 갓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둘째 아들 용회가 고열로 입원했는데 급성 맹장염으로 판명되었으나 열이 높아 수술을 망설이고 있다가 수술을 강행키로 했다고 하였다. 병원은 안국동에 있으며 원장이 나를 잘 안다고 하였다. 병원에 가보니 수술은 끝나있었고 열도 많이 내려 근심할 필요 없다고 들었다. 병원장의 이름은 기억 못하나 육군 병원장을 지낸 군의관 출신이었다. 어린 아이에게 미안하며 나와 자식의 병으로 혼자서 고생한 아내에게 미안함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아들은 워싱턴 DC 소재 National Academy Science 의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얼마 후 박정희 장군의 미국방문이 발표되었다. 나의 석방이 어쩌면 그와 관련이 있었구나 하는 짐작을 해 보았다.
그때 딸아이가 1961년도 숙명 여자중학교 입학시험을 준비 중이었다. 그 당시는 체력시험이 중요한 과목이었다. 나는 딸아이에게 달음박질과 턱걸이의 요령을 가르쳤다. 작은 요령이 체력 검정시험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집에서 한문의 기초를 가르쳤다. 그 당시부터 학교에서 한문를 소홀히 할 때라 집에서 가르쳐준 한문의 덕을 보았다며 지금도 그 당시 학교 졸업치고는 한문해독을 많이 하는 편이 되었다. 딸은 영양사가 되었다. 남편이 아주대학 화학과 교수로 나가있어 현재는 한국에 있으며 서울 미 8군의 영양사로 있다.
나는 석방된 후 나의 휘하에 군단 예비로 있던 제8 사단장 정강 준장이 구속됐음 알게 되었다. 정 장군은 내가 구속된 후 얼마 있다가 혁명에 가담한 만군 출신의 최주종 준장과 교체되었다 한다. 나는 미 군단장의 망명 조언을 듣고도 후일 나의 군단 참모나 사단장들에게 책임이 돌아가지 않도록 나의 책임을 다 해야하겠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전 군단에 비상 명령을 하달한 바 있었으나 정강 장군에게 공격 명령을 하달하거나 그에게 후일 책임질만한 지시를 내린 적도 없고 나의 명령 없이 부대출동도 가능하지 아니하였다. 또 전에도 언급했지만 나는 미군 지휘 하에 있는 부대의 출동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 장군의 후임 최 장군과 참모들이 강력히 그의 구속을 진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8 사단장의 재판은 나와 연관이 되게 돼 있었다.
<계속>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