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피니언] 영어 한글표기법 고쳐야

2008-03-12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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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흥주 프리미엄 소사이어티 회장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지난번 이경숙 대통령 인수위원장은 언론인과의 만남에서 ‘Press Friendly’(언론친화적)라고 말했더니 모든 언론이 ‘프레스 프렌들리’라고 적어(P와 F 발음을 잘못 표기해) 보도했다면서 처음 미국에 갔을 때의 경험담을 곁들여 ‘Orange’는 ‘오렌지’가 아니라 ‘아린지’라고 표기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을 대폭 수정, 보완해야 한다고도 했다.
필자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한글학자들은 모든 말은 한글을 기준으로 해야한다면서 비행기를 ‘날틀’, 이화여자대학교를 ‘배꽃 큰계집 배움 터’로 써야한다고 기세를 올린 적이 있다. 일일이 지적하면 수도 없이 많지만 영어로 Full도 ‘풀’, Pull도 ‘풀’, Fairfax를 ‘페어팩스’로 신문에 표기하고 있다. 미국에서라도 영어발음 그대로 한글표기를 했으면 좋겠다. 훈민정음 해례에 따르면 영어 v 발음은 ㅸ, f 발음은 ㆄ, sh 발음은 ㅿ, r발음은 ㄹ, l발음은 ㄹㄹ에 해당한다. 또 훈민정음에는 첫소리에 자음 17개, 가운데소리에 모음 11개, 다시 끝소리에 17개의 자음을 쓰게 되어 있는데 필요하면 이들 각각 3개까지 나란히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수학의 수열과 조합의 공식을 이에 적용하면 한글로 표기할 수 있는 발음은 천문학적 숫자에 이른다.
현행 외래어표기법 제1장 제3항 ‘받침에는 ㄱ, ㄴ, ㄹ, ㅁ, ㅂ, ㅅ, ㅇ만을 쓴다’라고 제한한 것과 제4항의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규정은 받침 표기가 없고 된소리발음이 드문 일본식 외래어발음을 흉내 낸 결과다. 제5항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하되, 그 범위와 용례는 따로 정한다는 규정도 일제 때 국내로 이식된 어설픈 일본식 외국어 발음을 우리말로 둔갑시킨 독소조항이라고 보아야 한다.
일본말로 마쿠도나루도(McDonald), 헤리코푸타(Helicopter). 맥도날드와 헬리콥터는 일본글로 표기할 수 없는 일본어 발음이다. 겨우 100여개 발음밖에 담을 수 없는 일본의 ‘가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고 중국 한자의 수의 몇 천배에 해당하는 소리글자들이 훈민정음이라는 소리의 보물창고에 들어있는 셈이다.
1997년 문화부 산하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이 내놓은 로마자표기법 개정시안으로 인해 평지풍파가 일었다. 여론의 포화가 집중됐기 때문이다. 기존의 ‘발음전사(轉寫)’를 버리고 지금의 ‘문자전자(轉字)’ 방식으로 가자는 것이 시안의 골자였다. 쉽게 말해, 외국인은 불편하지만 한국인은 편한 방향으로 표기법을 바꾸자는 제안이었다. 표기법이 바뀌면 도로표지판, 관광책자 등을 두루 손봐야 하니 비용이 많이 든다. 일정 기간 혼란도 불가피하다. 함부로 개정을 들먹거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 판국에 정작 표기법을 이용할 외국인은 뒷전에 제쳐놓은 시안이었으니 비빌 언덕이 있을 리 없었다. 많은 전문가가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되려느냐고 공개 논박해 문화부를 계면쩍게 하기도 했다.
개정작업은 결국 흐지부지되었는데. 개정시안이 불사조처럼 되살아난 것은 2000년의 일이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표기법 개정을 초고속으로 관철했다. 얼마간의 수정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은 불편하지만 무시하고 강행한 법령이다. 한국의 외래어 표기는 한글의 특수성 때문에 발음에 가까운 표기가 가능하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F나 V, R과 L 말고도 거의 대부분의 모음과 자음은 발음이 전혀 다르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느날 갑자기 김포공항 지명 표기를 Gimpo로 바꾸자고 외국인에게 ‘짐포’로 읽힐 테고 ‘Pusan’이 ‘Busan’으로 되니 두 방법 중 부산을 표기하는 건 B가 더 가깝다 뿐이지 절대적인 솔루션은 아닌 것이다. 국제음성학회에서 한글을 국제음성기호로 채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음소문자인 한글로서 수많은 외국어를 다 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을 개정해서 외국어발음 그대로 귀신소리도 흉내 낼 수 있다는 한글표기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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