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피니언] 김웅수 회고록

2008-02-06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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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웅수 예비역 소장, 경제학 박사

육군 군수 참모부장(11)

나는 4.19와 관련해서 잊지 못할 기억 몇 개가 있다. 4.19가 극에 달하기 전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때 학생과 야당의 압력에 대해 부정선거를 인정하는 방향의 태도를 취했으나 부정의 진상을 조사하되 난동에 대한 시위 범법자도 처단하겠다는 조건부 설명이 되었다. 그리해서 4.19 투쟁은 이박사의 불투명한 조건부 발언으로 수습의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되었다. 둘째는 이 박사는 어려운 와중에도 부상된 학생을 수용했던 당시 수도 육군 병원을 야밤을 이용해 방문한 일이 있었다. 이 박사가 정의를 부르짖었던 학생들을 문병한 것은 그의 정치를 떠난 젊은이들에 대한 애석의 표현이었다 생각되었다. 그가 4.19 직후 청와대를 떠날 때 “우리나라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가진 것을 나는 자랑으로 생각한다”는 요지를 남긴 것을 보아도 이 박사의 병원 방문이 치례를 위한 정치행위가 아니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또한 경무대를 떠날시 경무대 차를 사양하고 걸어 나올 때의 군중들의 환호를 받은 사실을 봐도 그가 평범한 정치인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주었다. 나는 군인으로서 수도가 서울로 수복할 당시 황폐된 서울과 대전을 보면서 차제에 대전에 수도를 옮기는 것이 좋지 아니한가를 생각해 보면서 다른 분들과 의견을 나누어 본 적이 있다. 들리던 이야기로는 이 박사는 지금 중요한 것은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며 그렇기 위해서는 서울에 가서 UN군 사령관을 잡는 일이라고 하면서 서울을 고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의 생각이 모자랐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있었다. 해방 초창기의 가난과 무지, 그리고 민주 질서에 익숙지 못한 환경에서 미국과 싸워가며 대한민국을 수립하며 남침을 막으며 조건 없는 휴전을 반대하는 대가로 한미 방위조약을 이끌어낸 노 정객에 대한 공정한 역사 평가가 이루어졌는지 의심이 간다.
다음으로 아직도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아니하는 사건이 있다. 이기붕 의장의 자살 사건이 있은 후 당시 의무감인 정희섭 장군(그는 후일 박정희 정권 밑에서 보사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이 이기붕 씨 가족이 자결한 직후 현장을 방문, 사진을 통해 가족들의 비보를 나에게 보고해주었다. 당시는 계엄 하에 있었고 군에서는 군수 참모가 장례에 대한 업무를 취급하게 돼있어서이다. 그 사진에는 이기붕 의장은 넥타이 없이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고 그 옆에 연분홍색 한복차림의 박마리아 여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남 이강욱 순서로 정연하게 장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방바닥에 온 가족을 차례로 권총으로 쏘았다는 장남 이강석이가 사지를 펴고 방바닥 중앙에 엎드려 있는 사진이었다. 이 의장의 흰 와이셔츠에 핏자국이 있었고 박마리아 여사는 좌측 옆머리에 피가 보이며 남편 어깨에 머리가 기댄 사진이었다. 나는 당장 이것은 강욱이 대신 타살의 혐의가 있지 아니한가를 의심했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시체들이 너무 정연한 순서로 정리돼 있었기 때문이며 강석이 혼자서 골육을 차례로 쏠 수 있을까, 특히 강석이 동생이 형의 의사대로 부모에게 손을 대도록 그냥 둘 수 있을까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나의 추리에 불과한 일이다. 그 후 이기봉 의장의 비서실장이었던 한갑수 씨로부터 큰 공식 장례식을 준비하겠다는 건의를 받았다. 장례식에서의 불상사를 방지하는 방법으로 조용한 가족장으로 치러져 불상사는 없었던 기억이 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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