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껍데기는 가라

2025-12-18 (목) 08:52:56 강창구 김대중재단 워싱턴 김클락스빌, MD
크게 작게
2007년 12월 7일 아침 7시, 충남 태안군 만리포 해수욕장 부근해상에서 기상 악화로 유조선과 선박이 충돌하면서 원유가 유출되어 온통 난리가 났던 적이 있었다. 12월11일, 장화를 신고 사고현장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은 천막에 설치된 임시 종합 상황실에서 경찰청장으로부터 브리핑을 받는 자리,

상황보고가 끝난 뒤에, “지금의 역량으로 기름확산 사태를 막을 수 있습니까?” 조류, 북서풍, 북동풍…, 다시 묻기를, “지금의 조건으로 막을 수 있냐를 묻습니다.” “해상상태가 관건입니다. 또 연안의 소형선박등 비용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게 어딨어요. 막겠다는 목표가 분명한가?” “비용문제는 사후적 조치이고 제품이 부족하면 일본이건 중국이건 사오든지 빌려오든지 총력을 다해 막아야 하는데…”, “이제는 국민들이 용서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무조건 막겠습니다!”는 답변을 받아내고 나서, “그래야 국민들이 안심을 하지요.”

탁상공론의 현장을 여과없이 보여 준 장면이었다. 그런 10여일 후에 집권당은 대선에서 참패하고 권력을 내려놨지만 그 당시 대통령과 실무공무원 사이에 벌어진 생생한 ‘YTN 돌발영상’은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국민들의 뇌리에 지금도 강하게 남아있다.
매년 각 정부부처의 대통령업무보고는 밀실의 대화였고 국민은 알 수도 없었다. 그 자리에 국민은 없었다. 김영삼대통령은 행정낭비라고 이를 폐지해 버렸다. 다시 되살린 것은 김대중대통령이었다. 가끔씩 TV뉴스에 대통령이 묻고 장관이 답하는 가운데 칭찬과 질책이 뉴스에 나오고, 강한 질책을 받은 장관을 안절부절했다는 것이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그 뒤로도 국민생활과 직결되는 업무보고를 투명하게 하겠다는 노력들은 있었지만 이재명정부에 들어서야 비로소 그 장면들이 국민앞에 생중계되는 세상이 되었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가 모두 지켜본다. 유사이래 예사롭지 않는 일임에 틀림없다. 한창 진행중인 내란재판정에 증인 출석 중인 박상우 전 국토부장관은 국무회의를 하기는 한거냐는 특검의 질문에 “재직중 단 한차례도 국무회의중 갑론을박을 해본 적도 그런 장면을 본적도 없었다.”고 증언한다.

국민은 이제 듣는데 머물지 않고 평가하는 위치에서 공직자를 바라보게 되었고, 공직자의 약속은 국민과의 약속이고 대통령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실제로 국민에게 보고하는 나라의 큰 틀이 바뀌는 순간이다.

말로만 번지르 하게 하는 지, 비록 어눌하지만 속에서 우러나온 진정성 있는 보고인지, 국민들이 알고 싶고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고드는 국정최고책임자를 보면서 국민들은 ‘어떻게 우리들 속내를 저렇게 정확하게 콕 집어낼 수 있을까 ‘ 하면서 놀라고 있다. 물론 잘하는 공직자에게는 상응한 대우가 주어진다.

출근해서 신문보면서 커피마시고 하루종일 특별한 사건 사고가 없으면 시간떼우고 퇴근하고, 권한만 있고 책임은 안지는 도둑놈 심보(?)로는 더 이상 공직에 설자리를 없애겠다. 이제는 구렁이 담넘어 가듯, 눈감고 아웅 할것 같지가 않다. 지난번 보고상황 하나하나를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대충이 없는 것이다. 그게 싫으면 떠나라는 것이다. 공직의 바깥세상은 벌써 오래전부터 삶이 전쟁이다. 죽도록 노력해도 살아질까 말까를 염려하는 나날이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땀흘린 만큼만 보상이 돌아오는 것이 옷을 입듯이 자연스럽게 몸에 베어있다. 그래서 공무원들이 긴장, 당황해 하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같은 이민자들의 생존현장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생활에서 누려온(?) 기득권 프리미엄(학력, 경력) 같은 것은 없다. 그걸 기대했다가는 실망을 넘어 절망이 눈앞에 버티고 있다. 그런게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자신에게 결코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한참 지난뒤에 알게 된다. 후회하고 자책을 반복해서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면 삶이 더욱 고달퍼진다. 국무회의는 물론 업무보고 영상을 지켜보면서 이제서야 조국이 제대로 하는 것 같아서 저절로 박수가 나온다고 한다.

시인은 짧은 몇줄로 답답한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 준다. 60년대를 대표하는 참여시인 신동엽(1930~1968, 부여)의 외침이 새롭다.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강창구 김대중재단 워싱턴 김클락스빌, MD>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