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태목사(뉴욕신학교 명예교수)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되며,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불과 30 단어도 안 되는 실로 겨자씨만한 작은 비유다. 그때 팔레스타인 사
람들은 제일 작은 것의 상징으로 겨자씨를 들었다. 그래서 “겨자씨만한 핏방울” “겨자씨만한 위법” “겨자씨만한 믿음(마태 17:20)”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겨자씨는 모든 씨들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은 아니다. 예컨대 삼나무(Cypress)의 씨는 겨자씨보다 작다. 다
만 겨자씨가 민중 사이에서 가장 작은 것을 대표하는 데서 선택된 것이다.
이 비유가 가장 명백히 보여주고 있는 것은 가장 작은 것이 특정한 시간을 지나서 가장 큰 것
이 된다는 것이다. 이 겨자나무는 서부 아시아와 유럽에서 자라는 브라시카(Brassica)라 불리는 식물가족이다. 팔레스타인산 겨자나무는 3미터에서 3.7미터의 높이까지 자랄 수 있다. 말 탄 사람만큼 자라는 겨자나무는 씨를 받기 위하여 주로 재배하지만 때로는 그 잎도 식용이 되었다. 천국은 작은 씨에서 출발한 그 무엇이다. 천리길도 첫 발을 디딤으로 시작된다. 가장 위대한 일들은 항상 가장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은 작은 것의 가치를 가르치시기 좋아하셨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물신(物神)을, 수와 크기를 숭배하는 현대인에게 예수님은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시는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크고 많음이 아니라 작지만 알찬 시작들이라는 것이다. 작은 갈릴리가 천국운동의
진원지가 될 때, 베들레헴에 하나님이 아기로 태어나실 때 보도의 대서특필은 없었고 다만 하늘의 별들만 깜박였다.
오늘 우리의 핵물리학은 가장 작은 것 속에 들어 있는 무서운 에너지를 알아냈지만 예수님은 그 옛날에 가장 작은 씨앗 속에 있는 놀라운 “가능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가능성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가능성이 실현되려면 ‘과정’이 필요하다. 하루아침에 한 길 높이로 클 수 없다. 식물이 자라는 것처럼 꾸준하고 보이지 않는 발전을 통하여 천국이 성취된다. 씨 뿌리는 행위(seed-sowing)에서 시작되어 자라나는 행위(tree-growing)로 이어지는 천국의 모형을 이 비유에서 우리는 읽게 된다. 씨란 좋은 밭을 만나서 싹이 나고 나무의 모습으로 자라나기 위해서 존재한다. 심어지지 않고 한 알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씨는 가능성을 영원히 눌러 버리고 만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너무 미미하기 때문에 아무런 효과도 가져올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작은 노력이 쌓여진 결과를 하나님은 사용하신다.
이 비유에 세 요소가 있다. 1.겨자씨, 2.큰 나무, 3.공중의 새들. 작은 겨자씨들이 자라나서 수풀을 이루니 공중의 새들이 모여들었다. 여름나무의 풍성한 잎들은 사람들의 마음도 넉넉하게 해준다. 새들이 날아들어 바람으로부터 보호받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아늑한 둥지를 만들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다. 그 겨자나무 꽃에서 결실된 많은 씨들을 양식으로 삼을 수도 있다. 천국에서는 그 구성원도 문제이지만, 거기에서 우리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환경’이다. 밧모섬의 요한이 계시록 21장에 신천신지·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천국의 구조에 해당하고, 22장에는 ‘환경’을 그렸다.
“천사는 또 수정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와서, 도시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흘렀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내고,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쓰입니다(계시록 22:1-2). 이것은 하나의 은유(metaphor)다. 겨자씨가 자라나서 이룬 수풀, 그것은 새들이 깃들어 평화스럽게 살 만한 환경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만일 그것이 천국의 축도인 교회라면, 사람들이 가보고 싶은 교회, 가볼 만한 교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