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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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자식사랑

2007-08-1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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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LA에서 101번 북쪽 프리웨이를 달려보면 내가 혹시 길을 잘못 달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대규모 포도밭이 끝없이 이어져 마치 나파밸리를 옮겨 놓은 듯하다.
그 정갈하게 이어져가는 나무와 나무 사이의 선과 리드미컬하게 굽이굽이 이어지는 포도넝쿨의 아름다움에 빠져 한참 달리다 보면 사관생도들의 사열이라도 받는 기분이다. 넓고 넓은 대평야의 포도밭-하나의 거대한 작품 같다.
얼마 전 그 길을 운전해서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막내아들을 찾아갔다. 아들네가 언덕 위 옥탑방 같은 작은 집을 사서 이사한다기에 딸과 손자손녀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도착하여 보니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이라 짐은 거의 새 집으로 옮겨져 있었는데, 너무 집이 작아서 신혼의 얼마 되지 않는 살림살이인데도 짐을 반쯤 들여놓고 나니 나머지 반을 들여놓을 데가 없었다. 난감하여 수선을 떨다보니 날은 어둡고 배는 고프고 우리는 모두 지쳐 있었다. 그런데 손자가 문제를 만들었다.
그날은 마침 해리 포터의 마지막 제7권이 밤 12시 정각부터 시판된다는 날이었다. 아이는 그 책을 꼭 그 시간에 가서 사야 한다는 것이었다. 길도 모르는 낯선 동네에서 칠흑 같은 밤중에 어디 있는 지도 모르는 서점을 찾아간다는 게 그 때의 상황으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충 짐을 옮기고 저녁을 먹고 나니 10시가 다 되었는데 아이는 잠잘 생각도 않고 눈을 반짝이며 한 시간 있으면 책 사러 가야 한단다. 아이의 엄마, 즉 내 딸이 LA에서부터 운전하고 와서 얼마나 피곤할까 생각하니 나는 손자의 그런 요구가 부당하다고 야단이라도 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엄마, 즉 내 딸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아들이 그렇게 그 책을 읽고 싶다는데 엄마로서 피곤이 무슨 큰 문제이겠느냐”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도 나는 극구 만류하고 싶었다.
하루 종일 운전하고 짐 정리 돕느라 딸은 눈이 휑한 상태였다. 그런 딸이 애처로워 나는 “내일 밝은 날 아침에 가서 사라”고 계속 설득을 했다.
그리곤 나는 어느새 잠이 들었는가보다. 잠결에 딸과 손자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할머니 몰래 조용히 나가자”
나는 말리기를 포기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아이들은 새벽녘에나 돌아온 것 같았다. 할머니로서 손자 사랑하는 마음이 아무리 극진한들 어찌 엄마가 제 자식 사랑하는 마음과 비교가 되겠는가.
나 역시 손자에 대한 사랑보다 내 딸에 대한 사랑이 더 깊었는지 피곤한 딸을 귀찮게 하는 손자의 요구가 속상하기만 했다.
언제나 느낀다. 자녀 교육이라면 만사를 제치는 딸의 자식 사랑하는 마음을. 하지만 때로는 그 모습이 애처로워 연민의 정을 느끼며 딸을 지켜본다.

에바 오 /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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