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교여행

2007-08-1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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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

1979년, 18세 때 나는 기독교 선교단체의 일원이 되어 버스를 타고 디트로이트를 떠나 남쪽으로 대륙횡단을 하며 텍사스를 거쳐 멕시코 국경을 넘었다. 낮은 물론 밤에도 버스에서 잠자며 쉬지 않고 달려 과테말라 국경을 넘었고 그 곳 북서쪽의 한 산중에 도착하여 한 달간 머물렀다. 그리고 1년 후 그 곳은 20세기 후반에 가장 잔혹한 민족말살이 벌어진 곳이 되고 말았다.
우리들 대부분은 미국인 백인 중산층으로 대학생 또래였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창조론 대 진화론에 대해 그리고 성경이 문자 그대로 읽혀져야 하는가에 대한 토론을 했다. 많은 노래를 함께 불렀고, 많은 기도를 함께 했으며, 설사에 대한 농담을 했고, 서로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고, 많이 껴안기도 했다. 이런 유의 모임이 기대하는 만큼 우리는 감성적으로 서로를 의지하기에 이르렀다.
멕시코 어디쯤인가에서 버스의 에어컨이 고장 났다. 7월이 멀지 않았던 때의 지독한 더위는 우리를 더욱 가깝게, 나아가서는 더욱 행복하게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과테말라 고산지대의 현실은 모든 걸 바꾸었다. 우리가 물 공급 프로젝트로 도와주려던 마야 원주민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탄압받는 민족이었다. 당시로부터 25년 전 우리 미국 정부는 이 나라에 포악한 독재자들이 줄줄이 배출되게끔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우리가 도착할 즈음 그 동네를 포함한 수많은 동네에서 반공이란 이름으로 납치, 고문, 강간과 살인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그 후 4년 동안 그들은 강제로 수용소에 옮겨졌고 22종의 마야 언어를 쓰던 그들의 문화는 폭력으로 짓밟혀졌다.
떠들썩했던 기억들도 많지만 하나의 조용했던 기억을 들춰본다. 6월21일 자정을 지난 한 밤중 나는 나를 맡은 마야 원주민 가족의 원룸 집에서 잠이 깨어 흙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훨민 디아즈. 그와 그의 아내는 ‘맘’이라는 그들의 언어로 소곤거리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모음과 자음이 섞여서 나는 그 소리는 상당히 감각적이었고 아름다웠다. 한 시간 가량 듣다가 잠에 빠졌다. 그로부터 4년 후, 내가 아는 한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과테말라에서 보낸 여름 동안 그 곳을 여행했던 우리의 무모한 이유들은 대개 증발하고 말았다. 버스 안에선 많은 수가 기독교는 진실한 어떤 문장을 믿는 것이라 믿었었다. 문장 X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믿었던 것이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던 친구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얼마나 현실과 무관한가를 깨닫게 되었다. 세례 요한이 “옷 두 벌이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누가복음 3:11) 하던 기독교 본래의 자비로 되돌아갔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유아기적 미성숙함을 안고 선교에 참가했다. 당시 나는 언어학자가 되고 싶었다. 언어학 전공을 하면서 마야어의 문법에 매료되어 있었다. 마야어의 동사를 활용하거나 발음변화를 예상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쓰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 선교여행은 나를 바꾸었다. 마야 동사에 관한 글을 쓰기보다는 디트로이트의 운동권 회보에 과테말라에 관한 칼럼을 쓰게 된 것이다. 교수가 된 지금도 전산과 학생들을 모두 컴퓨터에서 떼어내 타문화의 봉사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만들고 싶다.
유럽 친구들은 내가 나의 미국 친구와 한국 친구들이 얼마나 많이 기독교 선교여행을 떠나는가를 얘기하면 놀란다. 그들은 선교모임들이 얼마나 무모한가에 대한 그들의 비판적 대화에 내가 함께 할 것을 기대한다. 아프가니스탄의 한국인 납치사건으로 다시 그런 대화들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진정으로 그 한국인들의 무모함을 비판할 입장이 아님을 인정한다.
2,000년 전 이 세상에 심어진 급진적 자비의 씨앗은 본질적으로 무모하고 충동적이며 순진한 것이다. 그것은 사랑인 것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케빈 커비 /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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