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삼전도의 치욕에 대한 재해석

2007-06-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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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 김훈 저

김훈의 새 소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막바지, 남한산성으로 쫓겨 들어간 인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익히 아는 대로 병자호란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함으로써 끝이 난, 역사의 한 대목이다. 김훈의 소설에 장소가 제목으로 등장한 것은 처음이지만, 결과적인 얘기로 김훈의 소설에는 장소가 큰 의미를 차지한다. 죽어야만 하는 시간 속에서 내내 죽을 자리를 보고 다녔던 이순신과, 열 두 가야의 고을을 현으로 담아 낸 우륵처럼, 이번에는 온 몸으로 치욕을 감내해야 하는 인조가 남한산성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번민한다.
대개 어디로든 열려 있는 바다와, 개활된 전장으로 변해 버린 고대 삼남의 땅과 달리, 남한산성은 안으로 옥죄이고 밖으로 닫힌 공간이다. 그래서 성이라는 닫힌 공간을 때때로 묘사하는 김훈의 글은 더욱 슬프다. 전작들에 비해 ‘남한산성’에서는 딱히 주인공이 없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시대적 배경속에 강화도까지도 가지못해 남한산성으로 도망을 가야 했던 인조와 그의 신하들 김류, 최명길, 김상헌. 그리고 서날쇠로 대변되는 당시의 민중들. 이 모든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강산은 피폐해가고 아무런 죄도 없이 임금이 왔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생계수단을 봉쇄당하고 이유 없이 죽어가는 백성들과 무관하게 주화파의 대표주자인 최명길과 주전파의 대표주자인 김상헌은 인조를 둘러싸고 끊임없는 갈등을 발생시킨다. 영의정인 김류는 유유부단의 극치. 어려운 결정은 모두 왕이나 다른 신하에게 넘기고 시답지 않은 이유로 병졸과 당하관들만 괴롭힌다. 이런 모든 현상들 속에 오히려 유일하게 소설속에 기명으로 등장하는 천민 서날쇠가 더 대단해보인다.
김훈은 승리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패배는 아예 잊고자 하는 바람에 역사책의 단 석 줄로 병자호란을, 삼전도를 정리하려 하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무심함’에 대고 길게 깐죽거린다. 단문에서 단문으로 거칠게 이어지는 문장의 호흡이 읽는 이를 거북하게 하지만, 김훈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구사할 수 없는 힘있는 문체는 모든 문장마저도 나긋나긋하게 여성화 되어가는 트렌드에 대한 정면도전인듯 싶다.

이형열 / 알라딘 USA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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