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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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섭함’

2007-05-1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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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

20년 전 대학원 시절, 결혼을 몇 달 앞두고 한국인 약혼녀와 함께 새해 첫날을 맞을 때였다. 두 번째로 함께 맞는 새해를 그녀답지 않게 아무런 감흥 없이 맞고 있었다. 입을 꼭 다물고 있어 말을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우울해 있었다. 무슨 일이냐 묻고 물어도 아무 일 없다고만 할 뿐이었다. 내 ‘눈치’론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뭔가 내가 감지하기 힘든 어떤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이런 일은 그때가 처음도 아니었지만 마지막도 아니었다).
숱한 질문 끝에 알아낸 것은, 내가 그녀의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 새해 인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말하기 전에 내가 미리 알아서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일을 통해 난 또 하나의 한국 전통을 배웠고 지금까지 잘 지키고 있다.
무엇보다 그 일로 강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그때 그녀가 썼던 표현이었다.
“한국말로 하면‘섭섭’하다라고 하는데…”
아직 한국말을 잘 모르던 때였고 세월도 많이 지났건만 그 단어는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 강한 이미지를 남기고 있다.
우리 가족은 영어로 말할 때도 ‘섭섭’이라는 단어를 많이 섞어 쓴다. 그래서 이 단어는 지금도 우리 생활 속에 얼굴을 내밀곤 한다. 내게는 외국어이기 때문에 베일에 가려 알듯 말듯한 가운데 실제 의미보다 더 강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 같다. 아내가 내게 ‘disappoint’ 했다고 한다면 그저 내가 실망을 시켰구나 하고 말텐데‘섭섭’하다라고 하면 내 인간성 자체가 완전히 실패하고 만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교수들은 종종 학생들로부터 일류 기업체에 들어갔다거나 일류 대학원에 입학했다는 이메일을 받는다. 그런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보람을 느끼는데, 얼마 전 한 학생이 직장을 구했다며 이메일을 보내왔다.
우수반 언어학 클래스를 들었던 학생이었다. “교수님의 클래스를 수강한 덕분에 학교 근처의 한국 식당에서 웨이트레스로 일하게 되었어요. 기쁘시지요?” 이 얘기를 들은 다른 학생이 물었다. “교수님, 그 학생한테 ‘섭섭’하세요?”
물론, 아니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그녀는 여름방학 동안만 그곳에서 일할 것이라 했다. 그녀는 그 클래스를 통해 한글 읽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그곳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글을 배웠다고 한국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을 한 그녀가 자랑스럽다. 전혀 ‘섭섭’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삽삽’(?)하지도 않다.
실은 처음 한국말을 배울 당시 얼마동안은 마치 ‘통통’‘탕탕’‘퉁퉁’등의 의태어나 의성어처럼 ‘섭섭’하다도 ‘삽삽’하다, ‘솝솝’하다 등의 비슷한 말들이 있는 줄 알았었다. 한국말을 막 배운 그 클래스의 학생들도 당연하듯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재미있다.
따지고 보면 ‘섭섭’이란 단어는 하나뿐이지만, 그 의미는 무척 여러 가지로 쓰여 지는 듯싶다. 정말 앞의 의태어, 의성어들처럼 미세한 의미의 차이를 다른 모음을 통해 다르게 표현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나는 버지니아 텍 사건을 보면서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섭섭’했다. 작은 것부터 따져 본다면 미국의 모든 미디어가 조승희의 이름을 올바로 발음해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에 ‘섭섭’했다. 그 보다 조금 큰일을 따져 본다면 그 대학이 사건을 처음부터 제대로 처리 안한 것에 ‘섭섭’했다. 더욱 큰일을 따진다면 내 미국 문화에 ‘섭섭’했다. 극적인 참사를 막 당했으면서도 총기규제에 대한 의견을 내놓고 얘기 못할 정도로 총기에 대해 보이는 강한 집착이 ‘섭섭’하다. 누군가가 총기 규제를 얘기할라치면 비극에 정치를 끌어 들인다는 비난을 퍼붓고 마니.
비극은 자기비판 그것도 아주 치열한 자기 문화 비판의 계기가 된다. 이 사실은 세계 모든 다른 나라에, 또 미국 내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명확하게 다가오건만 우리의 지도자들을 흔들어 깨우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 내 문화의 이 한 가지 면을 직시하면서 나는 ‘섭섭’하고,‘삽삽’하고,‘솝솝’할 뿐이다.

케빈 커비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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