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남자가 두려워하는 것

2007-05-0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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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두려워하는 게 무얼까. ‘남자, 사랑 그리고 성’의 작가 데이빗 진첸코의 분석이 흥미롭다. 그의 글을 보면 서양남자나 동양남자들의 심리가 비슷함을 느낀다. 나 스스로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져보며 공감한다.
첫째, 세면대에 빠진 머리털이다. 엷어지는 머리털을 보며 남자들은 비로소 나이를 실감한다. 그리고 낙담한다. 늘 꽃미남처럼 검은머리를 바람결에 흩날리며 살 줄 알았는데, 어느 새 이마가 벗겨지는 것이다. 머리가 빠진다고 인간성이 변하거나 매력이 줄어드는 게 아님을 잘 안다. 주위에 얼마든지 존경받고, 성공한 대머리들이 많다. 정력적으로 일하는 대머리 CEO들이 멋있다. 그럼에도 한 움큼 머리털을 세면대에서 줍는 날이면 남자는 서글프다.
아버지의 죽음이 큰 두려움이다. 가장의 모델이던 아버지의 사라짐에 남자들은 속으로 절망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천하무적 수퍼맨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점점 초라해져 갔다. 틴에이저가 되면서, 고집 센 가부장과 별 대화의 필요성을 모르고 지냈다.
그러다가 장가를 가면서 아버지의 조언이 그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삶의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내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자문해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 즈음 돌연히 아버지가 떠나가신 것이다. 나를 당신과 꼭 빼 닮은 가장으로 세우고 돌아가셨다. 그 책임감과 죄책감에 남자는 가위눌리며 밤잠을 설친다.
아내의 눈물도 무섭다. 여인들의 눈물은 호흡처럼 자연스럽다. 가식 없는 감정표현이다. 여자의 울음은 무언가 남자들이 잘못했다는 신호다. 문제는 대부분 남자들이 무얼 잘못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왜 갑자기 아내가 눈물을 쏟는지 의아해 한다.
그러나 아내들은 속마음을 몰라줄 때 운다. 평생 가정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세월이 억울하다고 느껴질 때 슬피 운다. 평생을 믿고 살아온 남편이 종일 일하고 돌아온 아내에게 밥상 늦다고 투정하는 그 사소한 이기심에 목 놓아 운다. 무엇보다도 식어가는 남편들의 사랑에 아내는 피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또 두려운 일은 내가 자식들의 우상이 되지 못함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자식들이 틴에이저가 될 무렵부터 나는 숭배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왜냐하면 나도 그 무렵, 아버지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렸으니까. 그러나 내 아이들이 조목조목 내 결함을 지적할 때, 아비들의 가슴은 찢어진다. 이 세상 누구의 비판도 아랑곳하지 않는 철면피들이지만 자식들의 말은 바로 심장에 박힌다. 그 중에서도 아이들과 함께 충분히 추억을 만들지 못했다는 못난 아버지의 직무유기 죄목이 가장 가슴 아프다.
남자는 거절당하는 것을 무서워한다. 지는 것과 거절당하는 건 다르다. 정정당당히 겨루다가 지는 것은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내 의도가 상대방에 의해 묵살되는 건 견디기 힘들다. 그것이 대통령의 결정이든, 임시직 고용 인터뷰든 정당한 이유 없이 거절당하는 것은 삼키기 힘들다. 다른 사람이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파워 게임에서 희생양이 되는 걸 무서워한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알량한 자존심과 컨트롤을 잃어버리는 것을 남자는 두려워한다.
그 중에서도 공공연히 남들 앞에서 거절당하는 수모와 창피를 제일 무서워한다. 체면을 중시해온 우리 남자들은 자신의 존재가치가 공중 앞에서 무너질 때 절망한다. 자신의 약함과 우둔함, 그리고 무능력이 백일하에 노출될까봐 노심초사한다.
그게 남자들에게 보호본능이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내 가정과 가족과 명성과 소유와 직장 등을 백마 탄 기사처럼 지키고 보호하려는 게 남자의 본능이란 뜻이다. 그 본능적 가부장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는 남자라는 딱지가 붙음을 무서워한다. 사명감은 절감하지만 그 해결 방법이 모호할 때, 내 능력 밖일 때, 남자들은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린다.
조물주여, 모쪼록 남자들을 두려움에서 건지소서!

김희봉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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