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사임당

2007-04-2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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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원 연못에선 고기가 뛰어놀고 봄이 지는 마당엔 하얀 프리지아와 연보랏빛 등꽃이 한철을 지나고 있다. 이젠 백합과 장미의 시절이 왔다. 블루제이라는 파란 새를 무척 좋아하는 나는 매일 땅콩을 던져놓고 새들을 즐겨 바라보는데 요즘은 새들이 아침에 나를 깨운다. 파란 새와 다람쥐, 고양이가 함께 노는 것을 보며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나비가 날아들 때엔 벗을 그리워하고 도마뱀이 지나갈 때엔 자세히 들여다보는 기쁨을 누린다.
아무래도 도마뱀도 그리고 연못의 물고기도 그려야 할 것 같다. 까치와 고양이가 함께 노는 민화가 달리 나온 게 아니구나 싶고 저렇게 예쁜 하얀 나비를 어떻게 그리나 싶다. 추상화를 그리는 내게 쉽지 않은 숙제이다.
패사디나에 있는 식당 벽에 걸린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그림)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경탄했던 기억이 있어 한국으로 돌아간 화가친구에게 책을 구해달라고 하여 신사임당의 그림을 책으로나마 가까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기가 막히게 맑고 고결한 격이 있어 평소에 즐겨 눈여겨보던 대나무 그림이 신사임당의 그림이란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선배화가들과의 대화에서 함께 숙연해지고 비장해지는 대목이 있는데 좋은 그림 그리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면할수록 끝이 없고 어려운 게 그림이라는 것인데 그럴수록 좋은 그림을 그린 화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저절로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아이들 잘 키우고, 남편 내조 잘하고, 남편 음식 잘 해주고, 집안도 정결히 잘 가꾸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하는 일에 한 경지를 이루는 것 - 스물한살에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결혼하여 미국에 와서 1년 만에 친정으로 돌아간 ‘철없는 아내’였던 나에게 숙연해지는 단어가 하나있는데 바로 ‘현모양처’라는 말이다.
신사임당은 아이를 일곱이나 모두 훌륭한 학자와 예술가로 키웠는데 그 셋째아들이 뛰어난 성리학자인 율곡이다. 남편은 결혼한 지 28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는데 그 1년만에 신사임당은 마흔일곱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남편이 관직에 오르지 못해 이리저리 이사를 다니고 넉넉하지 못한 살림을 꾸리면서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글과 그림에 정진하여 남편의 공부를 뒷바라지했던 그는 대담한 붓놀림으로 맑고도 힘찬 물가의 할미새나 백로를 그렸다. 남편이 공부에 정진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한 그림이라고 한다.
신사임당이 즐겨 그린 초충도도 아름답고 귀한 그림이지만 물새와 포도그림, 특히 대나무 그림에서 느껴지는 고결하고 힘찬 정기는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신사임당이 태어나고 자란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의 오죽헌에는 풀과 포도나무가 무성하고 검은 대나무의 숲이 있다고 한다. 한국에 가면 꼭 들려서 그의 귀한 그림을 보고 싶다.
학자 어숙선은 ‘패관잡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신씨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공부하였는데 그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세종대왕 때의 화가 안견에 버금간다고 한다. 어떻게 부녀자의 그림이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 있으며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겠느냐”
500년 전 사람의 글이라 부녀자가 그림 그리는 일을 특별히 얘기하는데 그림 그리는 아내를 둔 친구 남편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는 내게 웃음을 짓게 하는 대목이다.
그림에 완전히 빠져있다가 오후 6시 밥하러 뛰어들어 올 때가 가장 힘겨웠다는 선배화가, 아이들을 잘 키우느라 그림에 완전매진 할 수 없어 안타까운 화가친구, 그림은 왜 그리느냐고 그림에 질투(?)하는 화가친구의 애인, ‘현모양처’가 될 수 없었던 나 자신이 지나온 화가의 길, 그래도 그림을 그리고 싶고 더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여류화가들인 친구들과 조용히 정진하여 빼어난 경지에 이른 신사임당의 그림을 나누고 싶다. 특히 흑 비단에 비단실로 놓은 풀과 벌레들의 자수병풍을 500년이나 고이 간직하며 온전히 지켜온 옛 여인들의 그림 사랑하는 마음...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인가! 그림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

박혜숙 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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