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4월이 오면

2007-04-1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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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마다 4월이면 우리 가족이 이민 오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내 나이 35살 되던 해 4월5일 식목일에 대한항공 타고 꿈에도 생각하면 가슴 부풀던 미국 땅을 밟았다. 올망졸망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당시 이민 온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미국에 오면 누구나 영화에서 보던 미국 사람들처럼 사는 줄 알았다. 그래서 양단 한복 뜯어 이브닝드레스 만들고 아이들을 위해서는 동대문 시장가서 양복 천 끊어다 동네 양복점에 맡겨 재킷을 만들어 입혔다.
미국에서는 이발비가 비싸다 하여 이발 가위 사고, 빨래는 깨끗이 싹싹 비벼 빨아야 한다고 나무 빨래판을 사서 바리바리 이민보따리를 꾸렸다. 그렇게 우리 다섯 식구가 LA에 온지 벌써 30년을 훌쩍 넘겼다. 10살에 온 큰 딸이 올해 40살 이란다 .
미국에 도착해보니 나를 기다리는 것은 파티장이 아니라 바느질 공장이었다. 바느질 공장에서 실밥 뜯어내는 일부터 시작해서, ‘오바락’ 치고 닥치는 대로 일하며 죽을둥살둥 견뎠다. 남편은 학교 다니며 의사 자격증 시험 준비하느라 밥 먹을 시간도 아꼈다.
그 시절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이렇게 저렇게 막막한 일들을 하면서 이런 고생쯤은 타고난 운명이거니 하며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런 고생 덕분에 그 시절 이민생활 같이 한 친지들은 지금 안정된 생활을 한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우리 가족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큰 아들네 집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딸네 식구들은 하루 먼저 떠나고 우리 부부는 일 끝내고 그 다음날 떠나기로 했었다.
그런데 막상 떠나려고 보니 날이 잔뜩 찌푸려 모노 레이크 쪽은 눈이 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사진 찍는 것이 취미인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사진을 찍으러 갈 것인가, 아이들 집으로 갈 것인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눈 사진 찍으러 가자”하고 외쳤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딸에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고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변명을 했다. 그런 나에게 딸아이는 말했다.
“엄마, 우리에게 미안해 하지마세요. 아빠 엄마는 우리에게 해줄 것 다해 주었어요. 이제는 아빠 엄마 인생 즐기세요. 우리 삼남매 잘 지낼 테니까 염려 마시고 대신 좋은 작품 기대할 게요”
아이들 키울 때 별 다르게 해준 것도 없었다. 요즈음 젊은 세대 부모들이 자기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부으며 아이들 교육 시키는 걸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갓 이민와서였다. 아이들을 학교에 입학시킨 지 며칠 안 되었는데 온통 학교 내에 치킨팍스가 돌았다. 그것이 한국의 외마마라는 것도 뒤늦게야 알았다. 요즘에는 의학의 발달로 가볍게 앓고 지날 수 있지만 그때는 그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먹고 살 일이 바빠서 그냥 그렇게 방치해 두었고 막내 어린 것은 가려움을 견디기 힘들어 딱지를 긁어 콧등에 커다란 상처가 남았다.
이민의 고생을 다 잊을 수 있어도 막내아들 콧등의 커다란 상처는 여전히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에바 오 /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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