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활을 꿈꾸는 4월

2007-03-3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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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4월이 시작된다. 4월하면 의례 후렴처럼 붙는 말이 있다. ‘잔인한 달’이다. T.S. 엘리엇의 널리 알려진 시 황무지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차라리 차가운 겨울, 눈 덮인 땅속에서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생명만 유지하며 살아가는 망각의 세계가 더 따뜻하고 포근했다고 시인은 말한다. 나도 가끔 어려운 일에 봉착 할 때마다 잔인한 현실과 맞서기 보다는 모든 것 포기하고 산골로 도피하여 무심하게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 아닐까 하는 안이한 마음이 들곤 한다.
4월 하면 젊은 피를 흘리게 한 한국의 4.19 학생혁명, 남의 나라에 이민 와서 잘 살아 보겠다고 밤낮 일도 마다하지 않고 힘들게 일해 일구어 놓은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잿더미로 만들어 놓은 LA의 4.29 폭동 등을 생각하게 된다. 잔인한 달이라는 말이 크게 잘못된 표현은 아닌 듯싶다. 환경 파괴로 요즘에는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까지 몽골에서 날라 오는 황사로 4월은 잔인한 달을 넘어 끔찍한 달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4월을 좋아한다. 한국에선 이맘때쯤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고 산에는 진달래 꽃이 만발하는 계절이다. 처녀들이 나물 캐러 바구니 들고 산과 들로 나가 봄 처녀가 된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부활을 상징하는 봄의 중심에 4월이 있다. 3월은 겨울의 미련을 다 못 버린 것 같고 5월은 성급한 여름의 옷자락 같다.
옛날 누가 나에게 어느 색을 좋아 하는지, 어느 계절이 가장 좋은지를 물을 때면 난 주저 없이 옅은 하늘색이 좋다고, 저물어 가는 가을이 좋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약하고 감상적인 것들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던 것이 이제 나이 들어 머리가 희어 지고 힘이 약해지면서 부터는 옅은 색보다는 젊고 강해 보이는 색이 좋아지고 계절도 스러져 가는 가을보다는 모든 생명이 소생하는 봄을 좋아하게 됐다.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들의 힘을 빌어서 약해진 나를 보완 하고 싶은 무의식속의 욕망이 작용 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4월 들어서면서 온 대지가 봄기운으로 충만하다. 이곳 LA도 겨울은 겨울인지라 겨우내 뿌리로만 가냘픈 생명을 유지하며 나뭇잎들을 다 떨구고 죽은 것 같던 마른 가지에는 파릇파릇 어린잎들이 연두색으로 새 단장을 하고 부활을 구가한다. 공원 숲에는 작년에 비해 갑자기 식구가 늘어난 꼬리가 하얀 털 방울 같은 산토끼들로 파란 잔디에 활기가 넘친다. 겨울을 힘겹게 이겨내고 부활한 새 생명들의 등장으로 활기찬 4월의 고동 소리를 들으며 나의 늙은 가슴도 생동감으로 활력을 얻는다.
그러나 내가 4월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스터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유난히도 자살사건이 많은 것을 매스컴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생명의 존귀함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목숨을 값없이 버리는 이들을 볼 때 너무 가엾게 생각된다. 하찮은 풀포기들도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새 생명으로 소생하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이 세상에 오셔서 갖은 고초를 묵묵히 감내하시고 예정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며 새로운 삶을 다짐해 본다.

배광자 글렌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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