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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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한국말

2007-03-2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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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이 질문을 하였다. 필자가 알고 있는 세 가지 언어를 사용할 때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일이어서 당황했다. 그러나 질문을 받고 보니 느낌이 다른 것 같기도 하다.
그 중에서 한국어는 내 모국어이다. 언제나 자유롭게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다. 안심하고 거칠 것 없이 말을 한다는 편안함이 있다. 그래서 마음에 평화를 안겨주는 언어이며 내 자신이다. 일본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선택의 여지가 없이 습득한 언어이다. 자유롭게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섬세하고 예의 바른 언어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여서 이쪽도 조심하면서 자존심을 세우며 대화를 나누게 된다.
영어는 이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의 생활 도구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솔직하고 뒤가 없는 것 같아서 대화를 하면서 이쪽도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사교적인 것이고 이해타산이 포함되면 맹렬한 공격수로 바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친구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필자의 애매한 대답에 질문한 대학생은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한국학교는 퍽 재미있는 곳이다. 거기서 만나는 어린이들과 학부모들이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과 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 우선 학생들의 언어나 동작이 새롭다. 흡사 미국인 같은 영어 구사력, 어눌한 한국어 표현, ‘하이’도 못하고 절하기도 쑥스러워서 빤히 쳐다보는 어린이들의 곤혹스러운 눈빛을 이해해야 한다.
학생들의 한국어에 대한 의견도 재미있다. 한국어에는 존대어가 있고, 때로는 명사에도 구별이 있다. 예를 들면 임금님의 끼니 음식을 ‘수라’라고 하며 어른의 밥은 ‘진지’이고 일반적으로는 ‘밥’이라는 설명을 들은 어린이의 지적이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주의 발달이 늦은 것이 아닌가요.’ 또 그들은 말한다. ‘밖에 개가 오셨어요’ ‘아기가 주무셔요’ 이런 표현을 웃을 게 아니다. 적어도 한국어에 존대어가 있음은 이해하였으니까.
큰 학생에게 ‘선생’이란 말은 교사직을 뜻하기도 하지만 미스터·미세즈·미스를 높여서 말할 때도 ‘선생’이란 말을 쓴다고 하였더니 이런 편지가 왔다. ‘선생 허’. 또 언젠가는 이런 글도 읽었다. ‘오늘은 날씨가 아주 더웠다. 그래서 소나기를 세 번 했다’ ‘샤워’를 영한사전에서 찾아보고 쓴 글이다.
그 학생은 한국에서 온 친구를 보고 ‘너 얼마나 늙었니?’하고 물었다. 나이가 알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어떤 학생은 ‘목욕물이 맵다’고 소리쳤다나. 요즈음 흥미 있는 글을 읽었다.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이란 글에서 예로 든 ‘Get out of here 당장’이다. 전에 들은 말 ‘Thank you 다’를 연상한다. 이 말은 영어인가, 한국어인가.
‘플라워에 워터를 주어라’는 ‘꽃에 물을 주어라’로 말하고 ‘엄마 나 픽업하세요’ 대신 ‘엄마 나 데리러 오세요’라고 말하라는 강요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이러한 말의 이중성이 이중정체성과 관계가 있다는 구절에 주목한다.
또 한 가지는 치매에 걸린 사람이 오랫동안 전연 사용하지 않고 묻어두었던 모국어로 말한다는 보고이다. 뇌에 저장되었던 잠자던 언어가 되살아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한국학교는 생활용어와 모국어의 관계를 연구할 다양한 자료가 가득 찬 보고이다. 학생들에게 나타나는 언어학적 반응이나 현상은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방법 연구를 돕고 있다. 이 길은 새로운 길이다. 따라서 학생과 교사는 시대를 앞장 서는 개척자들이다.

<허병렬> 교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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