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굴비 전쟁

2007-03-0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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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이다. 모처럼 영광굴비가 선물로 들어와 오랜만에 제대로 된 굴비 구경을 하는구나 하고 기대하면서 포장을 끌러보니 좀 눅눅 하게에 말리려고 베란다 난간에 걸어 놓았는데 이틀 밤을 자고 난 아침에 일어나 보니 굴비가 두름째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난간 살을 하나 빼놓고 가져간 걸 보면 사람이 한 짓인데 그거하나 훔치려고 모험을 한 것 같지는 않고 의문이 안 풀리던 차에 담 밑을 보니 커다란 굴이 밖으로 뚫려 있어 필시 웬 짐승이 한 짓이 틀림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수사 의뢰를 하자느니, 신문사에 취재를 부탁하자느니, 이곳 짐승도 한국 영광굴비의 명성과 값어치는 아는 모양이라느니 농담을 주고받았다.
요즈음 한인 타운에서 굴비 전쟁이 한창이다. 지난해 연말부터 불붙기 시작한 이 굴비 전쟁은 이제 절정에 이른 느낌이다. 영광굴비는 물론 제주 굴비까지 가세해서 너덧 가지의 브랜드네임으로 선전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게다가 제품의 품질을 보증하는 특정 지역의 관공서장 인증서까지 붙이는 등 소비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 혼란스런 선전전 가운데서 소비자는 이만 저만 헷갈리지 않는다. 특정 지역, 대놓고 말해서 영광굴비는 한국에서도 공급이 달린다는데 이곳까지 멀리 와서 세일까지 한다는 건 어쩐 연유인가. 한국에선 중국산 굴비가 흔하다는데 왜 값싼 중국산 굴비는 대놓고 파는 게 없는가. 한국산과 중국산은 정말 다른가?
조기를 두름으로 엮어 해풍에 말린 게 쉽게 말해 굴비인데 예로부터 귀해서 자린고비 일화도 전해 오고 특정 지역 굴비는 왕실에 진상하기도 했다지만 오늘날에도 특상품이 한 두름에 100만원, 즉 1,000달러 가까이 한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그러니 웬만한 집에선 값비싼 굴비는 엄두도 못낼 일이다. 한때 연평도에서 많이 잡혀 연평도 조기가 명성을 떨쳤는데 지금은 그곳까지 가기 전에 남쪽에서 많이 잡아 오히려 연평도에선 조기가 귀하다고 들었다.
조기에 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은 나로서는 참조기와 부세, 수조기도 잘 구별을 할 줄 모른다. 그런데 하물며 영광굴비와 연평굴비, 그리고 제주굴비를 구분하고 중국산 굴비를 구별할 수 있으랴. 그런 지경이라면 뭣 때문에 내 자주적인 의지나 판단에 따라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서 값 비싼 대가를 치른단 말인가 하는 반발심마저 인다.
이곳 LA에서도 옛날 같지 않아 생활도 안정되고 여유가 생기면서 제대로 차려 먹으려고 하는 가정이 늘어난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굴비가 선물로도 인기가 좋아 지금 철을 만난 것 같다. 선물은 주고받는 이의 형편과 정성이 어울려야 고맙고 뜻이 깊지 값이 비싸다고 좋은 건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 굴비도 난무하는 상술에 휘둘려서 브랜드네임에 현혹되거나 값 비싼 데만 눈을 돌리지 말고 내 형편에 맞는 것으로 골라 선물도 하고 식단도 정갈하게 꾸미면 어떨까 한다.

글렌데일/배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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